패션은 관능적이어야…섹시한 구두 만들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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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패션 디자이너 피에르 아르디(Pierre Hardy·58·사진)가 한국을 찾았다. 서울에 자신의 상품만으로 꾸민 단독 매장이 문을 열어서다.

그는 최근 서울 명동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그가 디자인한 남녀 구두와 핸드백 등을 망라한 공간을 마련했다. 아시아에선 처음이다.

개점 기념으로 자신의 디자이너 인생 20여 년을 돌아보는 작은 기념 전시도 열었다.

대개 패션 디자이너·브랜드는 일본 도쿄를 아시아 진출의 교두보로 삼는다. 일반적인 관행과 달리 서울을 첫 행선지로 택한 것에 대해 아르디는

“매장을 내자고 한다고 무턱대고 ‘예스’ 하는 건 아니다. 서울이 날 불렀다. 팬들도 상당하고….

서울이란 도시에서 잘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아르디는 기하학적 무늬를 넣은 구두나 운동화, 가방 등 잡화로 유명하다. 프랑스 브랜드 에르메스에서 20년이 넘게 남녀 신발 디자인을 책임지면서 자신의 브랜드도 운영하고 있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 등은 그를 ‘섹시한 신발을 만드는 사람’으로 표현했다.

아르디에게 구두와 매혹적인 디자인 스토리를 들어봤다.

-‘섹시한 신발을 만드는 디자이너’란 평이 마음에 드는지.

“예, 아니오 둘 다다. 패션이란 모름지기 관능적이어야 한다. 난 슈즈 디자이너여서 신발로 그걸 표현한다. 여성 구두가 섹시하다는 건 (그것을 바라보는) 남성이 이런 구두를 관능적이라 느껴야 한다는 거다. 이런 상호간의 감정 흐름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만들어야만 이 같은 평가를 받는다. 그런 면에선 예라고 답할 수 있다. 한데 신발을 신고 늘 관능적이고 싶은 여성이 있을까. 일주일 내내, 24시간 동안 그러진 않을 것이다. 신는 여성이 어떨 땐 편안함을 느끼고 싶을 테니까. 그러니 한편으론 내 구두가 섹시하다는 평가가 마냥 좋지는 않다.”

-‘섹시한 신발’ 같은 평가를 들으면 보통 소비자가 겁을 내고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음.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내 디자인은 그래픽을 활용하거나 큼지막한 색상 덩어리, 즉 컬러 블록(color block)을 썼을 뿐이지 소화하기는 쉬운 편이다. 여성 구두에는 두 가지 색 이상을 섞어 쓰지도 않는다. 도전해 봐라.”

-다른 인터뷰에서 ‘섹시한 남성 신발은 카우보이 부츠’라고 했었다.

“어떤 남자가 신느냐에 따라 다르겠지(웃음). 그 대답은 이런 맥락이었다. 둔탁해 보이면서도 날렵한 디자인의 카우보이 부츠라는 게 남성성을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종의 환상이 거기에 투영돼 있다고 보면 된다.”

-구두 디자인 대가로서 ‘오늘 신을 것을 고를 때 이것만은 하지 말라’가 있다면.

“키가 작은 편이라면 너무 높은 하이힐은 금물이다. 1m55㎝ 여성이라면 힐은 10㎝가 최대치라고 생각한다. 패션에서 아름다움이란 비율의 문제다. 10㎝ 정도 더하면 멋져 보일 수 있지만 그 이상이라면 이상해 보일 것이다.”

-아시아 여성 중엔 키 1m55㎝~1m65㎝인 사람이 많다. 이들은 굽 높이 10㎝ 넘는 걸 신지 말라는 건가.

“통굽 구두가 있지 않나. 무거워 보인다고 생각할 테지만 그래도 작은 키를 감추고 멋져 보이고 싶다면 대안은 통굽 구두다.”

아르디는 1988년 프랑스 브랜드 크리스찬 디올에서 처음 디자이너 일을 시작했다. 90년 에르메스 남녀 슈즈 부문의 디자인을 맡았고, 2001년부터는 에르메스의 고급 보석 디자인도 도맡아 하고 있다. 2001년엔 에르메스뿐 아니라 또 다른 프랑스 브랜드 발렌시아가를 위해서도 구두를 디자인했다. 당시 발렌시아가 창조부문 총괄 책임자였던 디자이너 니콜라스 게스키에르와 협업해 독특한 신발 디자인을 내놔 성공시켰다. 높은 굽에 기하학적인 가죽 조각을 이어 붙여 발등을 감싼 것, 코가 과장되게 뾰족하면서도 선이 아름다운 구두 등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눈길을 끌었다. 당시 인디펜던트는 “아르디의 상상 이상의 디자인이 잊혀 가던 발렌시아가에 충격 요법을 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피에르 아르디 구두와 에르메스 구두를 모두 디자인한다. 다르게 만드는 게 어렵지 않은가.

“별로. 피에르 아르디 상품을 만들 때 난 연출자이자 감독이다. 에르메스에선 연기자와 같다. 브랜드가 시나리오이고. 역할을 달리한다 생각하면 되는 거다.”

-이름 있는 구두 디자이너로 20여 년 일하면서 최근까지도 교편을 잡았다. 선생은 왜 그만뒀나.

“20여 년 동안 프랑스의 디페레 응용미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교직은 재미있었지만 반복이 너무 오래 되니 지쳤다. 그리고 이제는 선택할 때라고 생각했다. 선생을 잘하려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겠단 생각이 들어 그만뒀다.”

-발렌시아가와의 협업, 에르메스와 꽤 오랜 시간 함께한 것 등 성공한 디자이너라 불릴 만하다.

“기분은 좋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패션계는 오늘 진짜라고 평가되다가도 내일 바로 가짜가 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 여기서 받는 호평을 즐기며 행복해 하는 건 덧없는 것 같다. 이탈리아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를 좋아한다. 그가 만든 패션 디자인은 패션계에서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했다. 있는 그대로 대단한 것이다. 누군가 내 디자인을 ‘혁신적’이라고, 내가 패션을 이끌었고 나만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냈다고 해줬으면 좋겠다. 그냥 독특하고 대중의 이목을 끄는 디자인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대중이 좋아하는 혁신적인 디자인을 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강승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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