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드러져 보이는 것이 계간지의 비대 인가|김윤식 교수의 「계간 문학지 이상 비대 현상」에 답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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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다음 글은 『오늘의 문단 진단』「시리즈」 두번째인 평론가 김윤식 교수 (서울대)의 글 『계간 문학지의 이상 비대 현상』 (본지 11월4일자, 일부 지방 5일자)에 대한 계간 문학지『문학과 지성』 대표이며 문학 평론가인 김병익씨의 반론이다.
김윤식 교수는 근간의 계간 문학지 「비대화 현상」에 대해 『소수 「엘리트」의 구심점화의 둔화』 와 『문학의 상품화』를 지적한 것은 어쩌면 사실 일수 있겠지만 그것이 반드시 「우려」할 사태로 해석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계간지의 편집 제작에 참여하는 한 사람으로서 문학 계간지의 발행 종수와 부수, 특히 그 영향력의 증대를 실제로 체험하면서 필자는 계간지의 이 같은 증대 현상이 우리의 사회·문화적 상황과 밀접한 연관 아래 이루어지고 있다는데 먼저 착목 되기 때문이다.
월간의 문학지, 종합지가 수다한데도 『소수 「엘리트」의 구심점』이 되어야할 계간지가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계간지 자체에 탓이 있기 보다 월간지들이 상대적으로 너무 「둔화」되어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우리의 월간지들은 현재 아무리 격조를 높인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대중지」의 편집 체제를 못 벗어나고 있다.
그것은 문화의 반성과 발전에 중추적 수단이 되는 비평지면이 그처럼 옹색하다는 구체적인 측면으로부터 그 잡지의 체제와 편집 방법에 이르기까지 얼마든지 지적될 수 있다. 더구나 의식 있는 독자들은 월간지가 일간지처럼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심증을 갖고 있으며 계간지의 침묵 또는 완곡 어법을 귀중히 사는 것 같다.
「퀄리티·페이퍼」로서의 계간지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 (이 기대를 얼마나 충족시키는가는 또 달리 검토할 점일 것이다)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계간지적 자세의 포기에서 얻어진 것이 아님을 여기서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설명은 『문학의 상품화』에 대한 우려에도 가해질 수 있다. 문학의 상품화는 물론 근대 문화의 기본 구조 중 하나로 굳어졌거니와 소수의 비상업적인 전위·실험의 몫은 계간지의 것이 아니라 더 적은 소수의 동인의 것일 것이며 계간지는 원래 그 중간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므로 첨단의 실험 혹은 무명의 신인을 발굴하여 기성화 시키는 동시에 이미 굳어버린 기존 체제를 극복하는 것이 계간지의 역할이다. 환언하면 계간지가 극소수의 동인들·신인들 (김 교수가 말하는 핵)의 작품을 발굴·육성하여 새로운 문화의 가능태로 받아들이면 상대적으로 비평적 안목이 약한 월간지가 이를 유행화시킨다.
계간지의 이 같은 「스크린」 기능이 「상품화」라면 당연히 이 상품화를 환영해야 할 것이다.
19세기초의 영국에서 자유방임주의와 공리주의가 활발하게 전개될 때 「맨치스터·퀄리티」「웨스트민스터·쿼털리」 등의 계간지 발행 부수와 영향력이 「더·타임스」의 그것을 상회했다는 사실에 상도 할 때 오늘의 우리 계간지들의 증대화가 결코 우려할 수 없는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더구나 각종 정기 간행물에서 「퀄리티」가 이처럼 희소한 판에 계간지의 증대는 <이상 비대>라기 보다 <바람직한 현상>이 될 것이다. 김윤식 교수가 말하는 『비상품화를 지향하는 동인 활동』도 계간지의 이 같은 활기 위에서야 효과적으로 전개될 수 있으며 저급 문화의 횡포를 억제하고 우리 문화의 『균형 있는 발전을 기대하는 것도 이 계간지 문화의 중추화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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