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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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시대를 따라 주류가 되는 예술의 「장르」는 바뀌어진다. 음악이 주름잡던 때가 있는가 하면, 건축이 가장 활발하던 때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조 때에는 다른 예술에 비겨 건축은 활발하지 못했다. 「모뉴멘트」로서 자랑할 만한 것도 5백년의 역사에 견준다면 그리 많지가 않다.
까닭은 있다. 너무나도 화와 난을 자주 겪은 까닭이다. 또 국력과 건축 「붐」과는 일치한다고 볼 수도 있다. 신라시대에는 토목공사가 대단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그랬다.
모든 것이 활기에 넘쳐 있었다. 비록 당의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바빴지만, 그런 속에서도 독자적인 문화를 마련하려는 창의력과 패기가 넘쳐 있었다.
경주에서는 거의 매일처럼 대 토목공사들이 있었다. 『성중에 초옥이 하나도 없고, 기와집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고 노래가 거리에 가득 차 주야로 끊이지 않았다…』 이렇게 삼국유사에도 적혀 있던 때이다.
건축의 유행은 언제나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중세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심이 「고딕」양식을 만들어 냈다면, 통일의 대업을 이룬 신라 사람들은 균형의 미를 살린 건축양식을 꾸며냈다.
건축에서 엄격한 황금 비율을 찾은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것은 불교미술이 도입된 탓도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당척부터가 황금 비율을 살리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지금 신라의 옛 건축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임해 전지를 보면 장대석열과 낙수구로 추측되는 너비 53㎝의 석구가 있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당시의 건축은 평면은 매우 다양하고, 또 누마루 형식의 돌출부가 많았던 것 같다.
초석은 정방형의 석괴 표면에 2중으로 조출한 주좌를 만드는 게 보통이었다. 그리고 기둥은 심한 배흘림을 가졌고, 높이는4.5m까지나 됐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삼국사기의 옥사조에 적힌 것을 보면 기층은 3층의 마석조로 했고, 목재는 주로 산유목, 실내는 자단심향목 등으로 흔히 귀갑문의 「모자이크」 장식을 썼던 모양이다. 궁궐에서는 또 수놓은 병풍과 발을 쓰고 원단은 회랑으로 만들고 벽에는 흰 석회칠을 했다. 중문 사방문도 이때부터 생겨났던 것 같다. 이런 건축미를 그대로 살려낸 통일전이 새로 고도 경주에 세워졌다.
그것은 단순한 옛 건축미의 재현만은 아니다. 통일을 이룩한 옛 신라인의 기상을 되살려 보자는 것이다.
신라는 정신적으로 오늘에 사는 우리와 퍽이나 가까운데 있다. 우리는 통일을 앞둔 옛 신라인과 똑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
통일에의 꿈도 그들 이상으로 강렬하다. 신라인의 옛 피를 우리가 오늘 느낀다는 것은 그러니까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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