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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년을 이어온-민족의 슬기 (19)|매천 황현과 절명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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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구한말 일제가 조선 침탈 야욕을 노골화하자 망국을 지켜보고 있던 이 땅의 지식인들은 대략 네가지 길을 택했다. 가장 많이 택한 것은 의병. 유인석·최익현·민종식·신돌석 등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장과 의병의 숫자는 연인원 15만명을 헤아렸다. 둘째는 일제의 강제 지배를 피해 중국·만주로 망명한 인물들. 한말의 문장가 이건창·김택영 등이 이에 속한다.
세쨋번이 은둔 생활을 하는 이들. 네쨋번이 민영환·송병선·황현 등과 같이 자결의 길을 채택, 왜의 지배를 거부한 인물들이다.

<29살 때 과거급제>
이들 한말 지사들의 행동은 어느 것이나 끊임없는 격랑을 헤쳐나가야 할 현재의 한민족에게 삶의 방식을 제시해 주는 것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특히 이들 중 강제 합방의 소식에 접하고 열흘동안 죽음만을 생각, 합방 12일 후 다량의 아편을 먹고 이 세상을 끝낸 매천 황현의 죽음은 그의 절명시와 함께 「이조형의 마지막 선비」라는 칭호를 가능토록 하고 있다.
이름보다 『매천 야록』으로 유명한 황현은 철종 6년 (1855)에 출생, 대원군과 민씨 일파의 세도를 경험하며 강제 합방과 더불어 생을 끝낸 불우한 선비였다. 대원군·민씨 일파·강제 합방 등이 의미하듯 이 시기는 개화와 쇄국의 틈바귀에서 성리학을 기본 정치 이념으로 채택했던 이조의 사회 체제가 붕괴, 당국의 과정을 겪는 풍운의 시대였다.
그는 세종대의 유명한 정승 황희의 먼 후손이었지만 황희 정승 이후 특출한 관직에 나간 선조가 없었기 때문에 명목만 사대부 집안이었을 뿐 농업을 주업으로 삼고 있었던 황시묵의 아들로 전남 광양에서 태어났다.
다행히 그의 할아버지 황절 (집)이 많은 재산을 모아 자손들이 학문할 수 있도록 터전을 닦아줬다. 또 황현의 아버지 시묵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학문을 자식에게 완성시킬 욕심으로 많은 서적을 구해주며 정열을 쏟았다.
그 결과 그는 가세에 상경, 당시 문명을 날리고 있던 이건창 김택영·강위 등과 교유하며 문인으로 활약했다. 또 29세가 되던 해에는 고종의 특명으로 실시된 보건과에 응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시관이었던 석이 한 장석이 황현을 몰락한 가문의 이름 없는 선비라는 이유로 차석으로 떨어뜨리자 나라가 어지러워 그의 포부가 펼쳐 질 수 없음을 알고 1차 귀향을 해버렸다.
그러나 선친의 강권으로 5년 후 (1888)에 다시 응시, 생원회시에서 장원으로 급제, 성균 생원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때 조선왕조는 임오군란 (1882)·갑신정변 (1884) 뒤의 혼란이 결국 파국을 향해 치닫는 상태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벼슬길에 나간다든지 문인으로 출세한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무의미함을 깨달은 그는 문우들과도 교유를 끊은 채 영구히 여생을 보낼 전남 구례로 낙향을 해버렸다.
서울의 문우들로부터 『다시 상경, 구국 운동에 참가하라』는 서신이 올 때마다 황현은 오히려 그들을 탓하고 귀국광인지중 (도깨비 나라와 미친 사람의 속)에 들어가 어찌 뜻을 펼 수 있겠느냐고 거절했다. 비록 그는 낙향함으로써 적극적인 구국의 방도를 찾지는 못했으나 그의 우국충정은 명문으로 유명한 그의 싯귀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한강수가 한숨짓고 북악산이 시름하거늘, 세도집 양반네들 아직도 티끌 속에 묻혔구나, 읽어보소 역대 간신들의 전기를, 나라나 말아먹지 어느 뉘 나라 위해 죽었는가』 (열수탄성백악빈, 홍진의구족잠신, 청간역대간신전, 매국원무사국인).
이 시는 1905년 을사조약이 이완용 등 오적 대신에 의해 체결된 소식을 듣고 피를 토하 듯 내뱉은 한 귀절이다. 이후 그는 망국의 울분이 치솟을 때마다 난세를 극복하려 했던 한나라의 충신 매복 등 열사 10명의 초상화에 시문을 적어 병풍을 만들고 그들의 지조 있는 행적을 사표로 삼았다.
이 같은 그의 행동은 지식인이 난세를 극복하는 전형의 한 방법으로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깊은 감명을 준다.

<일제의 야만 규탄>
이러한 우국의 생활 가운데 저술된 것이 바로 『매천 야록』이다. 고종이 즉위한 1864년부터 국치의 해인 1910년까지 46년 동안 조선왕조 말기와 대한 제국의 전모를 밝히는 중용한 기록의 구실을 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은 정사가 아닌 야사 특유의 공정한 입장에서 당시의 사실을 기록, 비판했기 때문에 현대인도 매천 야록을 읽게 되면 난세에 처한 지식인의 행동 규범을 터득할 수 있다는 것이 정설로 되고 있다.
「러시아」와 일본의 실력 다툼으로 고종이 「러시아」 공사판으로 피한 아관 파천에 대해 『충의에서도 아니고, 일본을 배척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단순한 권력 투쟁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이 책은 독특하게 평가하고 있다. 또 일부 의병의 민폐를 규탄하지만 의병에 대한 일제의 야만적 진압 방법에 대해 『사방을 그물 치듯 해 놓고 촌락을 샅샅이 수색하고 집집마다 뒤져서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죽였다』고 표현, 일제를 비난하는 엄정성을 보이고 있다.
이밖에도 서민 사회에 얽힌 얘기, 첩의 출신이기 때문에 당하는 슬픔 등 황현은 이조 사회가 갖고 있는 모순과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민족이 겪었던 시련을 기록하고 있다. 즉 부정부패, 나라를 잃게 되는 과정, 민족의 저항, 개항으로 인해 변천하는 당시 사회의 실상을 독특한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매천 야록 중 사실을 기록하며 첨가하는 논평 중 「개화」에 대한 평가에서 『외세를 물리치고 부패한 내정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우선 개화가 요구된다. 그러나 이때의 개화는 정신을 바탕으로 삼은 다음 물질적 발전을 도모해야 된다』고 말함으로써 개화가 물질 경향으로만 흐르지 않도록 경고했다. 이 같은 사실은 오늘날 근대화를 이룩하는 방법에도 부합되는 것으로 민족의 슬기로 계승될만한 선각자의 구상이었다.
황현의 이 같은 개화 의식은 현실 문제에도 나타나 모든 것은 유학에 근거를 두되 군사·형·경제 등 이용후생에까지 신문명과 현실 문제를 실질적인 면에서 다루고자 했다. 따라서 이 같은 입장에서 기록된 매천 야록은 당시의 선비들이 시골에 낙향하면 흔히 금풍농월에 빠지는 것을 극복, 항상 현실을 직시하고 사회를 평가하는 성향을 갖도록 했다.
특히 황현은 지리산 기슭의 구례에 우거하면서도 갑오경장 이후에는 대한 매일 신보·황성 신문·경보·기별지 등을 섭렵, 사건의 정확한 전모와 자신의 촌평을 달고 있다. 그의 촌평에는 고종이 폭군으로, 대신이 탐관오리로 평가됐고 친일파·의병·열사·조선과 관계 있는 외교관 등의 외국인도 그의 안목에 의해 놀라울 이만큼 정확하게 평가되고 있다.

<현실 비판의 안목>
그러나 황현은 자신의 이 같은 현실 비판에 대한 안목도, 나라를 걱정하는 삶도, 망국이라는 엄청난 역사적 현실을 극복할 수 없게됨을 통감하게 됐다. 즉 살아서 행할 수 있었던 모든 구국의 염원이 합방이라는 비극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는 강제 합방이라는 치욕의 길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자결의 길을 택하는 것이다. 자결이란 유학으로 평생을 수련한 이조의 선비가 도도히 밀려오는 일본 세력에 맞서 택할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아편을 먹고 죽기 전 열흘동안 구상한 끝에 지어낸 절명시 (전체 4수) 중 하나는 이 같은 그의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별항).
난세에 처한 지식인의 고뇌를 극명하게 묘사한 이 한줄의 시는 현대의 모든 지식인에게 감명을 주는 것으로 황현의 자결은 합방을 훌륭히 극복하는 한 방법임을 증명해준 결과가 됐다.
또 그는 유서에서 『이씨 조정에서 벼슬하지 않았던 자기로서 이씨 사직을 위해 죽어야 될 의무는 없다. 그러나 5백년 동안 선비를 우대했던 나라에 순국 지사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스스로의 떳떳함과 평소에 독서한 바를 저버리지 않으려면 죽음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기록했다.
따라서 황현이 가지고 있던 이조형의 선비관, 자결을 통해 과시한 합방의 거부 등은 민족사의 중요한 맥락을 이어주는 굵직한 사건들이었고 이들은 한국사 속으로 융해 돼 민족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슬기를 제공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정리=임연철 기자>

<참석자>
이광린 (한국사·서강대 교수)
윤병석 (한국사·인하대 교수)
염무웅 (문학 평론가)
진행 손기상 (본사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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