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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부인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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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3면

우리말 속담에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비단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상거래행위가 시작되면서 「외상」이란 파는 사람에게는 불가피한 것이었고 사는 사람에게는 매력적인 것이었다.
「외상」도 나중에 한꺼번에 갚는 단순한 「외상」이면 파는 사람 입장에서는 위험부담률이 높다는데 문제가 있고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벅차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이른바 「월부」라는 형태의 상거래 행위이다.

<전기제품 80%가 월부>
「월부」라는 상거래제도는 정확한 기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그 역사가 오래지만 우리 나라의 경우 그것은 60년대 후반을 고비로 하여 지금은 삶의 한 방편으로 생활화되고 있다. 최소한 1만원이상의 상품이면 무엇이든지 월부구입이 가능하고 거의 모든 가정에서는 매달 생활비에서 일정액의 월부금을 지불한다.
월부가 워낙 판을 치다보니까 그 같은 거래방식은 물건을 사고 파는데서 그치지 않고 사창가에까지 도입되어 유행이 됐는가하면 「보바르」식의 계약결혼과 월부제가 절충된 「월부살림」도 등장했다. 월부에 시달리는 「샐러리맨」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월부인생」이라고 지칭, 생활자체가 월부임을 자조하기에 이르렀다.
월부가 얼마나 생활 속에 깊숙이 침투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최근 한창 성수기를 맞고있는 각종 전기제품의 판매양상에서 쉽게 드러난다.
서울시내 약1백개 소에 달하는 전기제품판매대리점에 따르면 판매되는 제품의 80%내외가 월부로 팔린다는 것이다. 특히 「에어컨」·냉장고·TV·세탁기 등 값비싼 전기제품의 월부판매율은 더욱 높아 90%에 가까운 것으로 추산되고있다.
S상가에서 전기제품대리점을 경영하고있는 최모씨의 얘기. 『점포를 찾는 고객들의 태도를 보면 현금손님인가, 월부손님인가를 쉽사리 판별할 수 있는데 현금을 가지고 왔다가도 월부조건을 물어보고는 월부 쪽을 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외상」의 매력이 강조된 이야기인데 필요 불가결한 물건을 당장 현금이 없어 월부로 구입하는 경우라면 몰라도 현금을 가지고도 굳이 월부 쪽을 택하는 사람은 일부 군소 「메이커」제품의 월부가격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이다.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 월부가격은 보통 현금가격보다 10%점도 비싼 것이 상례지만 우리 나라의 경우 상품을 월부로 구입하자면 최소한 20%내외에서 최고 1백%까지 웃돈을 얹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월부가격에 「마진」이 붙는 것은 수수료·신용조사비·수금비·사고율 등을 감안한 불가피한 것이지만 왜 유독 우리 나라가 외국보다 더 높아야만할까. 그 까닭에 대해서 월부취급상들은 한결같이 사고율이 높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최고 백% 비싼 상품도>
G제품대리점을 경영하는 이모씨에 따르면 『월부가 유행하면 할수록 월부사기의 수법도 다양해지고 있다』는 것이며 보통 10건이면 최소한 1건은 사고가 난다는 것이다. 자기집도 아닌 집에서 월부로 물건을 들여다놓고 집을 옮기는 따위의 수법은 이미 낡은 수법. 앞문에서 받고 뒷문으로 빼는 수법, 운반도중 가로채는 수법, 수금원을 가장하여 월부금을 받아 가는 수법 등 기상천외의 수법들이 판을 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사고의 가능성 때문에 월부가격이 높다면 결과적으로 피해는 선의의 소비자들에게 돌아간다. 뿐만 아니라 현금가 1만5천원 짜리의 전기밥솥이 3만원으로, 7만원 짜리 재봉틀이 10만원이 넘는 값으로 월부 판매되고있는 현상은 월부시대가 낳은 기막힌 부조리이다.

<반갑지 못한 고향친구>
전집류 서적의 월부판매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여러 해 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척이나 친지가 갑자기 집이나 직장을 방문했을 때 10명 중 9명은 틀림없이 월부책 외판원이다. 이들이 떠맡기는 책들의 월부가격은 물론 정가. 그러나 이 책들은 거의 대부분이「덤핑」서점가에 가면 최하 정가의 30%에서 최고 50%면 살 수 있는 것들이다. 특히 이렇게 해서 사는 책일수록 사는 사람들에게는 불필요한 것들이어서 집집마다 구석에 처박혀 몇 년씩 먼지만 뒤집어쓰기 예사다.
월부시대의 비리는 일반대중으로 하여금, 불필요한 소비욕을 자극시키는데 있다. 월부는 마치 마약과도 같은 것이어서 동네단위로 급속하게 전파된다. 자기형편도 생각해 보지 않고 『남이 하니까 나도』식으로 무작정 월부상품을 들여왔다가 월부금을 갚지 못해 돈은 돈대로 내고 물건을 뺏기는 경우, 예기치 않았던 새로운 빛에 시달리는 경우 따위를 흔히 볼 수 있다.
「피아노」나 승용차, 심지어는 주택까지도 월부로 구입할 수 있게된 이 시대는 확실히 편리한 시대라고 할 수 있겠지만 「월부 인생」이 경우에 따라 삶 전체를 망치게 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 <곽규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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