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괴질(怪疾)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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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보이지 않는 많은 미생물이 공기 중에 떠돌며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있음을 실험으로 증명해 보인 사람은 루이 파스퇴르(1822~95)다. 그는 백조 모양으로 생긴 S자 플라스크로 인류의 오랜 무지를 깨우쳤다.

이 플라스크에 유기용액을 채운 다음 끓였다 식히면 아무리 오래 두어도 용액이 뿌옇게 흐려지지 않는다. 미생물이 생기지 않는다는 얘기다. 구부러진 플라스크의 목부분이 공기 중 미생물의 접근을 막았기 때문이다. 그 용액을 공기 중에 노출하면 금방 흐려진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미생물이 질병의 증상이나 결과가 아니라 원인임이 입증됐다. 질병은 더 이상 신(神)의 뜻이나 불가항력적인 자연현상이 아니게 됐다. 질병의 정체가 드러난 셈이다. 질병에 대한 과학적 처방도 뒤따랐다. 백신의 발견이다.

사실 백신의 개발은 세 딸을 병으로 잃은 파스퇴르의 꿈이었다. 그는 닭 콜레라가 창궐하던 1879년 여름 휴가를 떠나면서 콜레라 바이러스를 닭에게 주입했다. 몇 주 뒤 돌아온 그는 멀쩡한 닭을 보고 깨달았다. 약화된 바이러스가 진짜 바이러스의 침투를 막아낸다는 것을.

이후 인간은 미생물과의 전쟁을 벌여왔다. 미생물의 공격에 저항하는 약을 개발하면 미생물은 다시 스스로 돌연변이를 일으켜 약발을 밀쳐냈다. 1980년대 초 의사들이 천연두와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선언하는 순간 아프리카에 숨어 있던 에이즈가 세계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미생물의 입장에선 우스운 얘기다. 1993년 미국의 한 과학자는 호주 서부의 한 바위에서 34억6천5백만년 된 미생물 화석을 발견했다고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사실 미생물은 자기복제 능력을 가지고 지구상에 나타난 최초의 생명체다.

그 미생물이 서로 결합하고 분열하고, 혹은 보태지고 빠지는 수십억년의 진화 과정을 통해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미생물은 인류를 포함한 모든 생물의 조상이며, 수백만년에 불과한 인류의 역사와 무관하게 번창해왔고 또 번창해갈 생명계의 지배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동남아.중국에서 창궐해 급속히 퍼지고 있는 괴질(怪疾) 역시 미생물인 변종 바이러스의 공격이다. 동남아 등지에서 서둘러 입국하는 사람들의 입을 가린 마스크처럼 얼굴은 창백하다. 지구를 뒤덮고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존재인 바이러스와의 전쟁엔 국경이 없는 탓이다.

오병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