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독립군 야사 신일양 <제55화>2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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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경의 감시속에 실의의 나날을 보내야하는 나는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던차 경기도경찰부고등과장 주백이란 자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또 무슨 영문인가 했더니 적당한 일자리가 있으니 직장을 가지라는 얘기였다.
하는 일 없이 왔다 갔다 하는 내가 그들에게도 불안했던 모양이다. 직장을 주어 한곳에 묶어두자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고등과장이 추천한 직장이란 비운동우협회란 곳이었다. 내가 할 일은 각 역에 있는 선봉지점을 순회하면서 회계감사를 거들고 수입된 현금을 수금해 오는 것이었다. 월급은 39원. 전국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고 어느정도 신분이 보장되면서 감시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r겠다고 좌백의 권유를 받아 들였다.
월급장이가 되고 보니 한결 행동이 자유스러웠다. 내가 다니는 곳은 부산·평양·원산·신의주등 전국 곳곳이었다.
1927년 5월. 선련직원이 된지 10개월만이었다. 경의연의 신의주 못미쳐 백마라는 곳이 있었다. 이곳에 이르니 일본자동차회사에 보낼 자동차대금이 와 있었다. 액수는 8천5백원, 쌀 한가마 약15원이었으니까 지금 돈으로 1천1백만원 정도. 이 돈을 서울 본점에 전하라는 것이었다.
영수증을 써주고 현금을 챙겨 넣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신의주로 달리는 기찻속에서 꼼꼼 생각하니 다시 만주로 갈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결정을 하고 나니 마음은 벌써 만주벌판을 달리고 있었다.
만주 안동은 신의주에서 지척지간. 압록강을 넘으면 안동이다.
압록강의 일군검문은 삼엄했다. 그러나 출국의 경우는 좀 덜 했으며, 나는 선운의 직원으로 안동에 볼일이 있어 간다고 해서 무사히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만주의 공기를 마시니 한결 생기가 돌았다.
내가 주로 활동하던 길림성은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았다. 안동에서 화물선을 타고 상해로 향했다. 4일만에 상해에 닿아 임시정부를 찾아가니 모두가 반가이 맞아주었다.
나의 과거를 얘기하고 지니고 있던 돈 8천5백원을 전했다.
1919년4월에 수집된 임시정부는 당초 만주의 동삼성이나 노령에 정부를 두려고 했다. 그러나 일군주둔지라 안전지역이 못되었으며, 미주는 안전은 했지만 본국과 너무 멀어 상해로 결정됐다.
내가 갔을 때의 임시정부는 단단히 자리를 굳힌 뒤라 활동은 자못 활발했다.
국내유지들의, 거액의 의연금이 답지하였고 미국「샌프란시스코」의 대한국민중앙회가 재미교포로부터 모금한 3천「달러」와 재미대한여자애국단의 5백「달러」가 보내져 왔으며, 그 후 매년 3천∼4천「달러」씩을 보내와 초기의 임시정부 재정은 사뭇 윤택하였다.
정부기관지로 독립신문을 발간했는데 사장겸 주필이 문인 이광수였다.
김구선생은 당시 임시정부 노무총감이었다. 곧 만주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얘기했더니 조금만 더 있다가 가라고 권고했다. 나의 신변을 걱정해서였다.
임정에 머무르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도왔는데 하루 빨리 만주로 가고싶어 좀이 쑤셨다. 만주독립군들의 소식이 임정에 보고됐지만 정확한 것들이 아니어서 궁금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일본은 여러차례 「프랑스」정부에 대하여 상해 「프랑스」조계안에 있는 임정을 추방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프랑스」정부는 그때마다 이에 응하지 아니했다.
일본은 또 유능한 밀정들을 상해에 파견하여 풍족한 기밀비를 뿌려가면서 지사들에게 접근하여 체포, 혹은 포섭작전을 폈다. 내가 한 일중의 하나가 일본밀정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엔 깊이 관여하지 못하고, 곧 만주로 되돌아갔다. 김구선생께 간곡히 졸랐더니 그럼 가보라고 했다. 상해에 온지 2개월만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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