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제55화> 독립군 야사 신일양|고난의 일본 유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6년만에 되돌아온 서울이었다. 우선 내가 서울에 첫발을 딛고 나서 물었다. 장사동 박용대판서댁을 찾았으나 박 대감은 이미 고인이 됐고 가족도 이사를 해 다른 안부는 들을 수 없었다. 다만 대감 묘소만 경기도 여주군 대곤면에 있다는 얘기만 들었다.
이속락 선배 소개로 계동 윤태선씨 댁에 거처를 정했다.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으나 내 몰골이 고향을 찾을 형편이 못됐다. 인편으로 부모 동기의 안부를 듣고 전했다.
윤씨 댁에서 1개월쯤 머무른 뒤 이상재 선생이 나를 찾는다고 했다. 월남 선생은 나를 배재 학교에 입학시켜주신 은사님이시며 당시 조선일보 사장으로 계셨다.
나를 만난 월남 선생은 『일경의 감시로 서울에선 아무 짓도 못할 것이니 일본에 가 공부나 계속하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여비로 쓰라며 40원을 주셨고 동석했던 이동락 선배가 다시 20원을 더 마련해 주었다.
나는 필요한 서류를 마련한 뒤 그동안 신세를 졌던 윤태선씨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부산으로 떠났다. 부산에서 2일간을 머무른 뒤 관부 달락선으로 일본 하관에 닿았다.
일본에 들어오는 한국인들에 대한 일본의 감시는 대단했다. 나는 서울서 미리 마련해온 일본 유학에 필요한 기독교 자연 회관 중학교 졸업장과 도일 학적 증명서를 내보이고 무사히 상륙했다.
일본 땅에 닿으니 감정이 착잡했다. 이곳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하며 그 일이 잘될 것인지? 하관에서 하루를 보낸 뒤 기차 편으로 동경에 닿았다.
그러나 동경에 아는 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하루 이틀 지내는 사이 여비는 떨어져가고 갈 곳은 없고 영락없는 부랑 청년 꼴이 됐다. 학교 입학을 알아봤으나 학자금이 엄청났고 일자리를 구하니 마땅한 곳이 있을 리 없다.
할 수 없이 일비곡 공원 「벤치」와 삽곡에 있는 족고 밑에서 잠을 자는 신세가 됐다. 하루는 일비곡 공원에서 한 노인이 다가와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기에 매일 공원에 와서 놀기만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조선 사람인데 동경에 공부하러 왔으나 여의치 않아 일자리를 구하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노인은 약간 놀라는 기색을 보이며 『조선인이냐?』고 다시 물었다.
그리고는 『무슨 일이라도 하겠느냐』고 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니『인력거도 끌 수 있겠느냐』도 다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사위가 병원 의사인데 자가용 인력거를 끌 사람을 구하고 있으니 함께 가자고 했다.
노인과 함께 신전 구원 악정에 있는 사위의 병원을 찾아가니 병원 이름은 재등 병원이었고 원장은 재등이란 사람이었다. 재등씨는 대단한 호인으로 뜻을 굽히지 말고 공부를 계속하라고 했다.
인력거는 상오9시부터 밤8시까지 끌고(주로 왕진)8시부터는 야학에 다닐 수 있도륵 하고 그날부터 그 집에서 숙식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핫비」 (인력거부의 유니폼)를 입고 뒤꽁무니에 수건을 차고 나니 저절로 신세 한탄이 났다.
인력거를 끌고 우질정까지 달려 왕진을 하고 나니 생각 외로 힘이 들었다.
일군과 총을 겨누고 조국을 찾겠다고 만주를 내달리던 내가 적국 수도인 동경 한복판에서 일인의 인력거를 끌어야 하다니 하고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큰 뜻이 있으니 참아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인력거를 끌고 왕진을 가면 환자 집에서 수고한다며 꼭꼭 1원씩을 주었다. 이것이 매일2∼3원씩 됐으며 나는 꼬박꼬박 저축을 했다.
그러나 이 저축이 화가 되어 내 신분이 탄로되고 한국으로 쫓겨나는 처지가 될 줄은 미처 생각도 못했다.
하루는 조도전대 교수로 있는 강전이란 사람이 병원을 찾아와 진찰을 했는데 강전씨와 재등씨가 대단히 절친한 사이 같았다. 결국 재등씨가 내 이야기를 꺼냈그 강전씨의 주선으로 조도전과 인연을 맺게 됐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