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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도예 국제 「세미나」갖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지난 11월말까지 신안 앞바다에서 발굴된 송·원대 도자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세계 최대의 중국 도자기 보유국이 되었다. 현재까지 발굴된 8천여 점의 각종 유물 이외에도 내년 5월 발굴에서는 더 많은 도자기와 동전을 비롯한 당시 유물이 인양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중국 도자기 연구소 기준은 현재까지 자료의 부족에도 큰 이유가 있겠지만 중국 도자기만을 전공으로 하는 전문가가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송·명대 도자기를 다량 보유, 전문가를 확보하고 있는 일본의 학계와 비교 연구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지난 11월21일부터 약 20일간 일본 각지의 세계적 중국 도자기 전문가들과 신안 앞바다에서 발굴된 유형을 검토한 결과, 국내 학계와 마찬가지로 원초의 유물이라는 확증을 굳혔다. 구주 역사 자료관을 방문했을 때 원의 전성기 도자기 유물을 신안 앞바다 유물과 함께 비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일본이 가지고 있는 원대 도자기 유물은 「나가사끼」현 「다까시마」 앞바다에서 지난 1월 건져냈던 것.
굴 껍질이 붙어 있는 것을 비롯해 기형이 똑같은 것을 수십 점 확인할 수 있었다. 구주 역사 자료관의 도자기 전문가인 「가가미야마」·「가메이」 양씨는 필자가 내보이는 사진을 보고 일본측이 바다에서 건져낸 것과 똑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방일 기간 중 신안 앞바다 유물을 함께 검토한 「미까미·쓰기오」(동경대 명예교수)·「하세베·가꾸기」(동경 박물관 동양부장)·「하야시야·세이조」(동경 박물관 공예과장)씨 등 도자기 전문가들은 원대 중국 도자기 연구가 처음부터 새로 행해져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현재까지 일본의 도자기 연구는 송·명대를 중심으로 할 뿐 원대는 소홀히 취급하는 경향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원대가 몽고족이라는 이민족이 정치적으로 중국을 지배한 시기였기 때문. 그 결과 중국 도자기 연구가들은 원대의 도자기를 무시, 연대가 모호한 것은 남송(12세기)으로 올려 잡거나 명대(14세기)로 낮추는 경향이 있었다.
「미까미」교수는 신안 앞바다에서 원초 무역선의 유물이 일괄해서 발견된 이상 일본 자체의 송·원·명대 도자기들도 새로운 편년 설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세베」씨도 원대의 중국인은 정치적으로는 불우했지만 이에 대한 역작용으로 당시 중국인들이 상업과 예술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고 말했다. 따라서 원대 도자기를 경시하던 학계에 신안 앞바다 발굴 유물은 커다란 충격이고 원대 도자기의 재평가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다고 의견을 도시했다. 중국 도자기 전체의 특징을 연구하고 있는 「하야시야」씨는 중국의 무역 자기가 남방 계통은 ▲빛깔을 많이 쓰고 ▲문양과 기형이 복잡한 저질품이 많지만 한국과 일본 등 불교가 발달한 나라에는 고급품이 많이 수출됐다고 밝혔다.
이 같은 도자기 전문가들 이외에 한·중·일의 고대 무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신안 유물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일본의 경우는「에도」 시대까지만 해도 수십만개씩 중국의 당대부터 명대까지의 동전을 수입, 그대로 통용했었다. 따라서 여러 시대의 동전이 한꺼번에 발굴되는 것도 당연하다는 것이 무역사 연구자들의 견해였다.
한편 조선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쇠닻의 발견에 큰 관심을 보였다.
원래 송대까지는 닻을 뜻하는 한자로 「정」을 사용했었다. 그러나 명대에서는 「정」으로 표기했기 때문에 쇠닻은 명대부터 사용됐다고 여겼었다. 더구나 일본 구주 지방에는 원의 정복선이 침몰된 지점에서 수십점의 돌 닻을 인양했기 때문에 원대에도 돌 닻을 사용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신안 앞바다의 쇠닻이 당시 무역선의 것이라면 이 같은 일본 학계의 학설도 번복되게 된다.
필자와 만난 대부분의 일본인 중국 도자기 전문가들은 발굴이 완료된 후 국제적인 「세미나」를 개최, 최대의 중국 도자기 유물에 학술적 가치가 부여되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있었다. 【정양모 <국립박물관 학예 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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