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환에 꺾인 재기의 집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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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일본과 한국을 잇는 상업인으로서 상징적 존재였던 서갑호씨의 급작스런 별세는 국내 금융계와 일본 재계에 똑같이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929년 14세의 어린 나이로 현해탄을 건너간 그는 방직 회사 직공으로 출발, 맨주먹으로 판본 방적 (48년) 대판 방적 (54년) 상륙 방적 (56년) 등 일본에서도 굴지의 방적 회사를 설립, 일본 재계에 무시할 수 없는 기반을 구축했고, 「롯데·그룹」과 함께 일본에서 성공한 한국인으로 주목을 끌었다.
60년에 들어와 경제 개발 계획에 착수하면서 심한 자금난을 겪고 있던 한국 정부는 일본에서 기반을 굳힌 그의 국내 진출을 종용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서갑호씨는 63년 당시 태창방직을 인수, 방림을 설립하면서 재일본 실업인의 국내 진출의 효시를 이루었다.
이어 73년에는 6천만「달러」(투자 계획) 규모의 윤성을 설립, 본격적 건설에 들어갔으나 74년1월23일 윤성을 휩쓴 대화는 서갑호씨가 그 동안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윤성의 화재로 일본에 있던 판본 등 모든 재산을 담보로 빌려 왔던 부채는 갚을 길이 막혀 주력 기업인 판본이 74년9월 파산의 비운을 맞았으며 일본에 남긴 부채만 5백억「엔」을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국내 투자 과정에서도 외환은·국민은·각 시중 은행 등이 방림의 시설재 투입에 따른 1천만「달러」 지불 보증을 비롯, 1백억원을 넘는 대부·지보를 함으로써 윤성 화재의 여파는 의외로 넓고 크게 퍼졌다.
화재를 당한 후 서 사장은 윤성의 재건과 함께 방림의 경영에 심혈을 기울여 때마침 75년부터 일기 시작한 수출 「붐」을 타고 「풀」 가동에 접어들자 매일 새벽 2시 반부터 일을 하는 열성을 보였다.
결국 그의 이번 급서는 이 같은 과도한 일과 윤성 화재 이래 얻은 심장병이 원인이 됐다는 얘기.
어쨌든 서갑호씨의 사망으로 방림과 윤성·일본의 판본 등 숱한 숙제가 미해결로 남게 되었는데 개인 앞으로 남겨진 것이라곤 방림의 개인 출자분 18% (자본금 1백50억원) 뿐이며 나머지 재산은 일본의 법정 관리단과 한국의 채권 은행단의 결정에 좌우되게 됐다. 그의 유족으로는 미망인과 일본 국적을 가진 3남 3녀가 있으나 그들이 경영에 참가할 수 있는지 조차 아직 확실하지 않다. <신성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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