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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분단」을 보는 베를린의 할머니|【베를린=윤호미·장홍근 특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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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날 묻지 말아요>
독일의 할머니들에게 『전쟁 중에 어디서 어떻게 살았느냐』고 묻는 것은 하나의 실례로 통한다. 주부로서, 또 여자로서 엄청난 가시밭길을 밟아야 했기 때문에 그것은 서로가 「묻고 싶지 않은 과거」로 약속돼 있는 것이다.
단지 그 잊혀져야 할 과거가 「상처」로 남아서 생생하게 살아 돌기 때문에 요즘 독일의 할머니들은 곧잘 「전쟁은 그 희생자가 여자」라는 옛 이야기를 실감한다고 말한다.
「베를린」의 가시 철망을 건너다보는 백발의 「베를린」 토박이 할머니도, 「함부르크」의 울창한 숲 속 공원 「벤치」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 할머니도,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음악회에 예쁜 「드레스」를 입고 계단을 올라가는 할머니도 「혼자」라는 말을 모두 쓸쓸하게 대답한다.
『그래요. 우리는 오늘의 젊은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고 자부해요. 그렇지만 그것은 시대를 잘못 타고 났다는 것뿐이지 남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아요.』
30여년 전 당시 42세의 남편을 전쟁의 포로로 잃어버리고 지금까지 혼자 생활을 계속해 왔다는 73세의 어느 할머니는 『나는 하느님께 단 한가지, 자녀를 두지 않았던 것을 감사하고 있을 뿐입니다』는 말로 이 「시대」를 슬프게 표현했다. 자신의 친정 4명의 오빠들이 모두 전쟁에 나가 2명은 죽고, 1명은 두 다리를 잃고 1명은 척추마비로 꼼짝 못하는 몸이 됐다는 것. 그래서 그 오빠들의 미망인 올케들과 모여 있을 때인 「크리스머스」나 부활절의 기도는 언제나 울면서 한다는 것이다.
『이상한 것은 우리들 모두가 전쟁이라는 것이 왜 있는가 하는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어요. 오직 그 전쟁의 뒷마무리는 여자가 한다는 것만 눈으로 봐서 알고 있을 뿐이지요.』

<노인의 도시 베를린>
이 시대, 전쟁의 체험자로서 독일의 할머니들은 갑자기 변해 버린 세상을 참으로 『착잡하게 본다』고 했다.
「노인의 도시」라고 별명이 붙어 있는 「베를린」에서 벌써 반세기 넘게 살아 왔다는 「아날리제·타페르트」 할머니 (67)는 『남들은 우리 독일 국민이 뼈를 깎는 고생을 해서 오늘의 경제 부흥을 했다고 부러워하지만 글쎄요, 이런 것을 얻기 위해 그런 고생을 해야한다면 정말 서글픈 세상이군요』했다. 누구에게도 권하고 싶지 않다는 그런 고생을 그는 경제 부흥을 위해서 한 것은 아니었다고 힘을 준다.
『전쟁이 여자에게 주는 어쩔 수 없는 고생이었으니까-』 할머니들은 거의 체념으로 그 「고생」들을 오늘의 부흥된 생활과 비교하면서 소일한다.
『요즘도 보리죽 생각만 하면 온몸이 움찔거려요. 지긋지긋 합니다.』 『감자 밖엔 못 먹었는데 감자도 껍질째 먹었지요.』 『구두는 학교에서 공작 시간에 만들어서 신도록 했지요. 나무로 밑바닥을 하고 그 위에 헝겊을 붙인 것인데 이것을 신으면 너무 발이 무거워서 아이들은 으례 맨발로 다녔지요.』

<미국화 돼 가는 생활>
성냥을 켜서 몇 사람씩 돌려가며 쓴다든지, 옷에 가죽을 대어 기워 입는다는 등 근검한 독일 민족상이 된 이런 이야기들은 할머니들에게 이게 『허무하다』는 또 하나의 쓸쓸함을 안겨준다는 것이다.
전쟁의 막바지에 「베를린」 국립 공원의 「벙커」밑에서 4백7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과 지내 왔다는 「타페르트」 할머니는 독일이 가장 든든하게 자랑하던 울창한 수풀들이 땔감으로 잘려 나가는 것을 봤을 때 무엇보다 슬펐다고 했다.
『우리는 미국의 덕을 많이 봤지요. 그래도 그들이 우리가 아껴왔던 나무들을 함부로 쓰는 것 같아 얼마나 가슴 아팠는지 몰라요.』 누구든지 전후에는 미군들이 주는 담배를 음식물과 바꿔서 연명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미국의 덕으로 이 땅이 보호됐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잘 사는 나라 미국의 사람들이 물건을 흥청거리고 쓰는 것을 봤을 때, 전쟁을 막 겪고 난 생활에서 엄청난 거리를 느꼈었는데 오늘은 그것이 생활이 됐다고 놀라면서 씁쓸해한다.
『요즘 학교 다니는 아이들과는 너무나 차이가 커서 우리 어렸을 때 하면서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어요. 전쟁 중에 학교를 다녔다는 「지그리트·휠센베르크」 여사 (42)는 요즘도 신문에 「패션」 사진이 나오면 어색해 보인다고 했다.
『무엇이든 구두쇠처럼 아끼는 생활이 좋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렇지만 웬일인지 요즘같이 흥청거리고 사니까 사람들이 자꾸 욕심만 생기는 것 같아 서로 사는 것이 불편해져요.』 「휠센베르크」 여사는 범죄가 늘고 젊은이들이 말썽을 일으키고 물건값이 오르는 것이 모두 이런 욕심 때문이라고 개탄한다.

<불편도 이제는 체념>
벌써 l5년 전에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베를린」 장벽은 두쪽 나라 생활을 하고 있는 독일 사람들에게 아직도 가장 전쟁을 되새기는 현물이 되고 있다.
『나는 화가였던 내 남편이 벌써 전쟁 전에 「히틀러」에게 미움을 받아 작품 활동을 금지 당해 왔어요.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고향 땅에도 못 가는 신세가 된 것을 누구에게 원망하겠어요?』 30년대 자연주의 화가로 명성을 떨쳐왔던 「게오르크·타페르트」의 미망인인 「아날리제·타페르트」 할머니는 아직도 동독엔 학교 친구들이 많다고 했다. 물론 그들 친구들도 이제는 연금 생활자 (남 65세·여 60세 이상)가 돼서 마음대로 서독으로 다니러 올 수 있지만, 그리고 자신도 마음대로 다녀올 수 있지만 절차를 밟아야 되기 때문에 좀처럼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베를린」 거리 어디에서도 분단을 볼 수 있는 것은 관광객의 「코스」인 45km의 장벽만이 아니다. 『불편하다』는 체념에서 시작되어 『왜 이렇게까지 됐나』하는 전쟁 체험자들의 어쩔 수 없었던 과거에 대한 기억들이 자꾸 살아나는 생활, 그 속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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