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염재호 고려대 부총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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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동영상은 joongang.co.kr [최효정 기자]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 김수영(1921~68) ‘폭포’ 중에서

암울한 시기였다. 1970년대 우리 사회는 성장의 문턱에 있었고, 나는 인생의 목표를 설정해야 하는 대학 시절이었다. 지금처럼 풍요로운 시대도 아니었고, 마음 놓고 떠들어댈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다. 혼돈·방황·좌절·불안 등이 젊은 날의 표제어였다. 대학 첫해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탈것 없이 무작정 걸었다. 일 년 다니고 휴학을 했다. 학점은 바닥이었다. 그럭저럭 대학생활을 하면 자동으로 사회로 배출되는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탄 느낌이 싫었다. 복학 후 법대생이면 누구나 도전하는 고시를 포기하고 학문의 길로 들어서기로 결심했다. 노동이 아니라 호기심으로 충만한 공부는 기가 막히게 재미있었다.

 그 당시 나를 붙들어 준 시가 김수영의 ‘폭포’다. 김수영의 산문집 『시여, 침을 뱉어라』는 조지훈의 『지조론』과 함께 어지러운 세상의 나침반 같은 책이었다.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지고” 싶어서 한눈팔지 않고 책만 봤다. 전공서적뿐 아니라 철학·역사·문학·신학 등 인문학에 탐닉했다. 그저 폭포처럼 책을 읽어 치우는 것만이 위안이 되었다.

 당시 김수영의 시는 폭포처럼 살자는 기개를 품게 했고, 폐부를 찌르는 그의 글들은 폭포 같은 청량감을 주었다. 이제는 시냇물·강물·바닷물도 다 아름답지만 그 시절은 폭포만이 나를 감동시키는 물이었다.

염재호 고려대 부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