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反戰 열풍에 親美정권 바늘방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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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반전.반미 시위가 거세지면서 중동지역 친미(親美) 이슬람 정권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슬람 시위대들은 '형제국'인 이라크가 공격받는데도 자국 정부가 미국을 지지하는 데 분노하고 있으며, 아랍국 정부들은 반정부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초긴장하고 있다.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는 지난 28일 1만5천여명의 시위대가 반전.반미 구호를 외치면서 자국 친미 정권에도 화살을 돌렸다.

시위대들은 '무바라크=샤론'이라는 피켓을 들고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의 친미 정책은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의 대(對)팔레스타인 강경정책만큼이나 역겹다"고 비판했다.

시위대는 또 무바라크 대통령의 후계자로 거론되고 있는 그의 아들 알라 무바라크를 겨냥해 "우리가 네 아버지를 미워한다고 전하라"라고 조롱했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반미감정을 의식, "미 군함의 수에즈 운하 통과를 허용하지 않는 등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 편을 들지 않고 있다"고 해명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성직자들이 28일 미국 주도의 전쟁을 비난하며 "침략자들에 맞서 성전(지하드)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메카 대사원의 성직자 샤이크 살리 빈 후마이드는 "이번 전쟁은 실패한 전쟁으로 아무도 승자가 될 수 없다"며 전쟁 중단을 촉구했다.

미국 중부사령부는 반미 분위기를 의식, 29일 "사우디아라비아 상공을 지나는 토마호크 미사일 발사를 중단한다"고 밝혔다.

이라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요르단의 남부 도시 이르베드에서는 정부의 시위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29일 5만여명이 반전시위를 벌였다.

영자 일간지 요르단 타임스는 "정부 각료들이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지 않는 데 대해 젊은 세대들이 비난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란.예멘.아랍에미리트.인도네시아 등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들에서도 대규모 반전시위가 계속됐다.

이라크와 적대적인 쿠웨이트 정부는 27일 미.영군의 이라크 침공을 돕는 데 대한 아랍권의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해 구호물자와 인력을 지원해 이라크 국민을 돕겠다고 나섰다.

쿠웨이트의 지원은 자국 및 주변국 국민들의 비판 여론을 달래면서 전후 이라크 새 정권과의 관계개선도 노린 것으로 분석됐다.

이라크전이 2주째 계속되는 가운데 아시아.유럽.미주 등의 반전 시위는 더욱 거세지고 있다. 미국 보스턴에서는 29일 학생들을 주축으로 수만명이 모여 베트남전 이래 최대 규모의 시위를 벌였다.

이라크에 2백명의 병력 파병을 약속한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도 2천여명의 시위대들이 미 대사관 앞에서 "석유를 위해 피를 흘리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두행진을 벌였다.

반전에 앞장서고 있는 독일에서는 북서부 도시 뮌스터와 오스나뷔르크 간 50㎞ 구간에서 3만명의 시위대가 전쟁 중단과 평화를 기원하는 인간띠를 잇는 등 전국적으로 10만여명이 시위에 동참했다.

암만(요르단)=이훈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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