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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서는 안 될 일을 기억해야 할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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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박일호
이화여대 교수·미학

참 잘 잊어버린다. 오랜만에 찾아온 제자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가끔 있다. 얼굴은 기억하는데, 이름이 영 생각나지 않을 때는 무척 곤혹스럽다. 우리 과 학생인지 필자의 과목을 수강했던 학생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때도 있다.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그저 ‘자네’라고 부른다. 이런저런 얘길 하면서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 학생을 보내고 나서 한참 후에 이름이 떠오를 때, 그 친구가 얼마나 서운했을까 생각하며 혼자 쓴웃음을 짓는 적이 있다. 미안한 마음도 있고, 이젠 나이를 먹었구나라고 느끼면서 조금은 허탈해한다.

 더 심한 경우도 있다. 창가의 책상에 앉아 있다가 문 옆에 있는 냉장고에 가서 물건을 꺼내려다 무얼 가지러 왔는지 생각나지 않을 때. 냉장고 안에 물건이 많은 것도 아닌데…. 우두커니 서서 떠올려 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책상으로 돌아와서 생각이 날 때 냉장고로 다시 가야만 한다. 왜 이런지 은근히 걱정도 되는데, 다행인 것은 이런 일이 필자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거다. 오십 중반을 넘긴 필자의 친구들 대부분이 겪고 있는 일이라는 말을 듣고, 적잖게 위안을 삼고 있다. 집사람은 술 탓이라고 한다. 이십대부터 지금까지 적당히도 아니고 심하게 즐겼으니 지금쯤은 뇌세포가 많이 망가졌을 거라는 얘기다.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아무리 취해도 집은 잘 찾아간다는 사실이다. 그날의 세세한 일들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할 때도 있지만, 무사히 집에는 도착해 있다.

 도대체 내 기억은 어떻게 된 걸까. 기억에 관한 글들을 이것저것 뒤져 봤다. 나이가 들면 뇌세포가 망가지고,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의 크기도 줄어들게 되며, 거기엔 술의 영향도 적지 않다고 적혀 있다. 다시 재생은 되지 않고 작아지기만 한다니, 기억할 수 있는 일이 그만큼 적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 기억에도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이 있단다. 정상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은 30초니까 안 잊으려면 적어두고 반복해야 한다. 이런 단기 기억들이 반복되고 쌓이면서 장기 기억이 되고, 그게 몇 달 몇 년 또는 평생 가는 것들로 남게 된다고 한다. 취해도 신통하게 곧잘 집을 찾아갔던 것, 지금까지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는 것들은 반복해서 만들어진 이 장기 기억 덕분이라는 거다.

 조물주가 사람을 아주 현명하게 만들어 놓았다는 생각도 해본다. 정상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이 30초라는 것은 다 기억하지 말고 적당히 잊어버리라는 뜻인 것 같다. 기억량도 적어진다니, 세월이 지나면서 잊을 것은 빨리 지워버리라는 얘기인 듯하다. 대신에 잊어서는 안 되는 일들은 반복해서 담아두었다가 오래 기억하고 다시 되새겨야 한다는 뜻이겠지. 별일도 아닌데 전전긍긍하며 가슴에 담아둔 일들은 없는지, 잊어서는 안 될 일들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도 가끔은 떠올려 보아야겠다. 적당히 잊을 줄 아는 법과 잊어서는 안 될 일을 구분하는 일이 삶의 지혜가 될 것 같다.

  세상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주변에도 잊어서는 안 될 일과 잊어버려야 할 일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 잊어서는 안 될 일들을 잘 기억해서 되살리는 게 더 중요할 때가 있다. 개인의 서운함에 그치지 않고, 사회와 우리들의 삶에 직접 영향을 주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선거가 다가왔다. 이 사람 저 사람 나서서 이 말 저 말을 자신 있게 쏟아낸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이번엔 이름은 기억하는데, 그 사람들이 한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4년에 한 번씩 하는 선거이니 반복해서 저장된 장기 기억은 물론 없고. 지난 일에 관대한 우리네 정서 탓도 있다. 그렇다고 그냥 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 여론조사 결과도 믿을 수 없다니, 그 사람들이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기억해내서 앞으로 하겠다는 일들을 가늠해 보는 거다. 우리들의 삶에 직접 영향을 주는 자치단체장과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달린 교육을 책임질 교육감을 뽑는 선거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4년을 위해서 기억을 되살려야 할 때이다.

박일호 이화여대 교수·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