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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만약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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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로버트 카올리 엮음, 이종인 옮김/세종연구원,1만6천원

우리는 지금 자신의 삶과 결코 무관치 않은 전쟁을 지켜보고 있다.

이라크군과 미.영 연합군의 전투 장면은 안방 깊숙이 포연을 피워 올리고 있으며, 그로 인한 지원군 파병에 관한 논란으로 '생각의 내전'을 치르는 중이다.

한편으로는 인류애와 도덕심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국익이라는 측면에서 '만약에'라는 가정을 전제로 전쟁의 전후 사정을 예상해 보기도 한다.

연합군이 승리한다면? 이라크군이 승리한다면? 단기전으로 끝난다면? 장기전으로 이어진다면? 오늘 밤, 침대에 기어오른 전갈에 물려 후세인 대통령이 사망해버린다면?

지난해 1월, 미식축구 경기를 보면서 프레첼 과자를 먹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목에 걸린 과자 때문에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면? 이와 같이 '만약에'라는 질문은 유혹적인 말이다.

이 책 '만약에'(원제 What If)는 그러한 가정과 우연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고찰이다. 전쟁과 군사(軍史)에 관해 서술하고 있으나 다른 역사책들과 전혀 다르게 책 속의 문장들은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하고 묻는다.

하지만 허황하지 않다. 정교한 사회과학적 상상력으로 구축한 역사 이면사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 때 이러이러 했다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하고 물어보는 가정(假定)의 역사를 가리켜 역사학자들은 역사학의 한 장르인 대체(代替) 역사라고 한다는데, 이 책은 동서고금의 20개 전쟁을 놓고 '만약에~'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미.영 두 나라와 이라크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라는 양대 종교의 국가를 대표한다. 오늘날 세계는 이 두 종교의 문명권 아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만약에' 기원전 701년 유대 왕국의 중심지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아시리아 군영에 전염병이 창궐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불가사의한 전염병으로 아시리아군이 철수하고 나자 유대인들은 적군을 물리친 전염병을 신성한 징조로 여기게 됐고, 예루살렘을 야훼 숭배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시련을 통해 단련된 유대신앙은 현대의 가장 강력한 두 종교인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를 탄생시키는 모태가 됐으니, 현대 종교사는 미세한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가 했던 역할을 부인할 수 없다는 발견을 이 책을 통해 하게 된다.

만약에 2천7백년 전 그 미생물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오늘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전쟁도 없었으리라는 가정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처럼 사소한 우연이 예측할 수 없는 요인으로 작용해 순식간에 확실한 현재 조건을 무효로 만들어버리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꺾지 않았더라면 '자유'와 '시민권'이라는 이상으로 이뤄진 '민주주의'는 없었는지도 모른다는 가정 말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서른두살에 죽지 않고 노년까지 살았다면 세계는 그리스어를 공통어로 하고 불교를 보편적 종교로 삼았을 것이다.

732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무슬림군이 승리했다면 무슬림이 지배한 세계에서 과학문명은 극도로 발달했겠지만 헬레니즘과 르네상스는 없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몽골 제국의 유럽 침공을 예로 들어보자.

1242년 유럽 공략을 준비하던 몽골군 군영에서 칭기즈칸의 셋째아들 오코타이가 죽었다. 몽골군은 부족의 법에 따라 새로운 칸을 선출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고 유럽은 겨우 살아 남았다.

당시 몽골군의 대표적 전략은 '대학살'이었다. 시체더미 속에 숨어 살아난 자가 있다는 사실을 안 뒤 그들은 모든 시체의 머리를 잘랐으며, 그들이 지나간 도시는 그야말로 '평원처럼' 평평하고 고요해졌다.

따라서 이러한 정복자들로부터 유럽을 지킨 사건은 '한 남자의 우연한 죽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런 사례는 많다.

만약에 1776년 8월 29일, 맨해튼 섬과 롱아일랜드 사이 이스트 강가에 자욱하게 내려앉았던 안개가 아니었더라면 미국의 독립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워싱턴 휘하의 대륙군은 한 명의 인명 손실도 없이 안개 속에서 모든 보급품과 대포를 가지고 퇴각하면서 세계의 역사를 바꿨다.

이 책에 실린 20편의 가상 역사 에세이는 모두 저명한 역사가.역사 전문가.역사 저술가들의 글이라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다. 예전 대체역사를 실험했던 복거일의 장편 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는 이제 역사학의 한 장르로 등장했으니 말이다.

배리 슈트라우스 미 코넬대 교수 등 이 책의 필자들은 그 점을 말해준다. 한 사람의 죽음이나 문서의 분실, 일기의 변화, 시기하는 마음과 이혼하고 싶다는 생각 또한 역사를 바꾸는 요인이 된다는 사실을 나열하면서, 가상 역사를 통한 흥미만이 아니라 사실에 포함돼 있는 우연성 또한 놓치지 않는 이 책을 이라크 전쟁 와중에 추천한다.

마르시아스 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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