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박스서 태어난 438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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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2일 오전 1시 김영선(25·가명)씨는 서울시 관악구 난곡로 26가 가파른 언덕길의 끝에 있는 주사랑공동체교회 앞에 멈춰섰다. 그는 태어난 지 겨우 20여 일 된 별이(여·가명)를 포대기에 싼 채 안고 있었다. 자정을 넘은 시간이라 싸늘한 추위가 느껴졌다. 포대기에 싸인 별이는 연신 칭얼댔다. 잠시 망설이던 김씨는 교회 건물 담장에 붙어 있는 철제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띠-’ 하는 벨소리와 함께 가로 70㎝, 세로 60㎝, 깊이 45㎝의 자그마한 공간이 나타났다. 일명 ‘베이비박스’로 불리는 상자다. 여기엔 ‘미혼모 아기와 장애 아기를 유기하지 말고 아래 손잡이를 열고 놓아주세요’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김씨는 별이를 박스에 넣고 급히 자리를 떴다. 벨소리를 들은 이종락(60) 목사가 잠옷 바람에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 목사는 아기를 놓고 떠나려는 김씨를 붙잡았다. 목사 손에 이끌려 교회 안으로 들어온 김씨는 울먹이며 말문을 열었다.

 “별이 아빠는 지난해 헤어진 남자친구인데 연락도 끊어졌어요. 부모님에게 임신 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고 아기를 키울 형편도 안 되다 보니….”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421번째 아기인 별이는 교회 2층에 마련된 9㎡(3평 남짓) 크기의 아기 전용방으로 옮겨졌다. 방에는 먼저 들어온 두 명의 아기가 잠들어 있었다. 이 교회 정영란(44·여) 전도사는 별이의 전신을 카메라에 담았다. 날이 밝자 관악경찰서 소속 경찰관이 별이의 입속에서 DNA를 채취해갔다. 별이가 나중에라도 엄마를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 이틀 후엔 관악구청 직원들이 별이를 서울의 한 아동전문병원으로 데려갔다. 별이는 그곳에서 장애 여부 검진을 받은 후 아동일시보호센터를 거쳐 관악구 소재 한 아동양육시설에 입소했다. 나흘 동안 별이의 보호자는 다섯 차례나 바뀌었다.

 취재팀이 교회에 머무르던 지난달 11일부터 15일까지 별이처럼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이는 4명이었다. 이 중엔 “아내의 외도로 태어난 아이라 어쩔 수 없다”며 하소연하는 40대 남자도 있었다. 태어난 지 겨우 이틀 지난 남자 아기도 있었다. 출생 일시가 적힌 종이에는 발도장만 덩그러니 찍혀 있었다. 한 고교생은 “도저히 키울 자신이 없어 맡기고 갑니다”라는 편지와 함께 아이를 놓고 갔다.

지금까지(5일 기준) 베이비박스에 들어온 아이는 4년 간 438명이고 지난해에만 252명이다. 2011년 35명이던 버려진 아기 수가 베이비박스가 생긴 후 7배 늘어났다. 현재 전국 281개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아이는 1만5000여 명으로 매년 줄어드는 추세다. 하지만 유독 서울시에서만 급증하고 있다. 베이비박스에 대한 입소문이 퍼져 지방에서 태어난 아기들을 서울로 데리고 올라와 놓고 가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서울시 일부 보육원에선 최근 수용 정원이 넘쳐 대기표를 만든 곳도 생겼다. 지난달 10일 한국 아이 입양을 둘째로 많이 하는 스웨덴 정부의 입양국 직원들은 베이비박스를 둘러본 뒤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아기가 버려지는데 한국 정부는 뭘 하고 있는 건가요?”

특별취재팀=강기헌·장주영·이유정·정종문·장혁진 기자, 사진=김상선·송봉근·박종근·강정현 기자
동영상=최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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