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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로니즘」붕괴 다시 군부체제로|「아르헨티나」무혈「쿠데타」의 배경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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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아르헨티나」군부는 「이사벨·페론」대통령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아르헨티나」는 민정이양 3년만에 다시 군부체제로 복귀했다.
오래 전부터 예고된 군부 「쿠데타」는 20개월에 걸친 「이사벨」통치에 종지부를 찍고 「아르헨티나」의 신화처럼 돼버린 뿌리깊은 「페로니즘」에 종말을 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군부 「쿠데타」의 악순환이 전통처럼 돼버린 남미에서 그래도 민주주의 형식을 시도해온「아르헨티나」가 군부체제로 몰아감으로써 남미의 정치속성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74년7월 남편인「페론」대통령의 사망으로 자동적으로 대통령을 승계한 「이사벨」은 망부에 대한 후광과 「페론」주의자들의 지지기반으로 한때 국민들의 환영을, 받았으나 무능과 무정부패가 노정 되면서 군부와 의회로부터 꾸준히 사임압력을 받았었다.
특히 그녀의 개인비서로 정치를 마음대로 주물렀던 괴점장이 「호세·로페스·레가」전 사회복지상의 비위와 감정으로 군부와 갈등을 빚었고 국민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면서 「이사벨」의 위치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사벨」자신도 복지성의 공공기금 중 75만「달러」를 불법 유출해 고「페론」의 이름으로 축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그녀의 정치생명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이처럼 「이사벨」자신에 얽힌 갖가지「스캔들」과 함께 정치·경제적인 불안은 「아르헨티나」의 정국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만성적인 「인플레」는 「이사벨」의 집권동안 무려 4백23%를 기록했고 대외채무는 1백억「달러」에 이르러 13번에 걸친 평가절하 조치도 속수무책이었다.
또 도시「게릴라」의 준동과 정치 「테러」로 1천7백 여명이 사망했는가 하면 3백만명의 회원을 가진 노조 총연맹(CGT)도 대금인상을 요구, 파업을 벌임으로써 정국불안을 가속화했다.
이와 같은 정치·경제·사회의 불안 속에서 군부는 작년 8월 「이사벨」이 지지해 온 군총사령관과 내상을 교체토록 압력을 가함으로써 「이사벨」은 이에 굴복하고 3개월간의 휴직을 요청하기도 했었다.
「이사벨」은 작년 12월12일 공군반란이 실패로 끝난 후부터 군부와 의회, 그리고 자신의 지지세력인 「페론」주의 당으로부터 사임압력을 받아 지난 2월18일 오는 12월로 예정된 대통령선거에서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번 「쿠데타」는 73년 경제파탄을 수습하지 못해 민간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했던 군부가「페로니즘」이 퇴색함에 따라 반발세력이 약화된 것을 기회로 다시 정권을 장악한 것으로, 현재는 군부세력에 맞설 수 있는「페로니즘」이 퇴색해있고 뚜렷한 민간정치인이 없다는 점에서 「아르헨티나」에는 군부체제가 장기화할 것으로 보인다. <김정식 기자>

<쿠데타일지>
▲1930년9월=「호세·에바리스타」장군의 「쿠데타」로 「이리고옌」대통령실각
▲1943년6월=「페트로·파블로·라미레스」장군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
▲1955년9월23일=「환·도밍고·페론」대통령이 「쿠데타」로 실각되고 군사정부가 수립됐으나 같은 해 11월13일 동군사정권은 또 다시 「환·카를로스·아람부루」장군의「쿠데타」로 축출됨
▲1962년3월29일=군부가 「아르투로·프론디지」대통령을 실각시키고 변호사「호세·마리아·기도」가 대통령에 취임
▲1966년6월28일=「환·카를로스·옹가니아」장군이 주동이 된 군부가 다시 정권을 장악, 「일리야」대통령을 실각시킴
▲1970년6월13일=군부가 「옹가니아」장군을 축출하고 「로베르토·레빙스톤」장군을 대통령으로 추대
▲71년3월=반「페론」파인 「라누세」장군이 「쿠데타」로 정권 장악
▲l973년=「라누세」정권이 실시한 선거에서 「페론」이 지명한「캄프라」가 대통령에 당선됐으나「페론」의 귀국으로 취임 7주만에 자진사퇴하고 총선에서 당선된 「페론」이 대통령에 취임.
▲1973년9월=「페론」은 취임 9개월만에 사망하고 부통령이던 부인「이사벨」이 대통령직을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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