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1백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명치유신을 앞두고 처음으로 미국에 건너간 일본사절단 일행 중에는 뒷날 그 나라의 근대화를 위한 정신적인 기둥이 된 28세의 복택유길이 끼어 있었다. 그는 1882년에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이 이 때를 회상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배를 타고 인도양에 이르자 영국인들이 자기네 식민지에서 제멋대로의 행동을 하고 있었다. 중국·기타지방에서도 주민들을 마구 부리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나는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당하는 인도인이나 중국인은 괴롭겠지만 영국인으로선 제멋대로 거동할 수 있는 처지가 얼마나 유쾌한 일일까 하고….
한쪽을 딱하게 여기는 동시에 또 한쪽을 부럽게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일본인이다.
우리도 언젠가는 꼭 인도나 중국인을 영국인이 대하듯 그들을 본떠서 눌러보겠다고 결심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누른다는 것이 때로는 통쾌한 일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어찌 장한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 때만해도 이런「모럴」에 입각한 판단을 일본인들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럴 경황이 없을 만큼 그들은 서구화를 서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같은 글에서 복택은 이렇게도 말했다. 『중국이나 조선을 대하는 방법은 이웃나라라고 해서 특별히 조심할 필요는 없다. 서구인이 중국·조선을 대하는 방식을 그대로 따르면 되는 것이다!』
사실이 그랬다. 지금부터 꼭 1백년전의 오늘, 강화에서 일본과 한국사이에 처음으로 수교조약을 맺었다. 구실은 이른바 「운양호사건」.
따지고 보면, 그 전해에 일어났던 운양호사건의 도발자는 일본이었고 그 피해자는 우리 나라였다. 이때 우리 쪽 전사자는 35명이나 되는데 비해 일본은 2명의 수병이 경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그 후의 경과도 일본의 개항으로까지 몰고 간 미「페리」제독의 행동과 비슷했다.
다른 것은 이를 받아들이는 국민의 자세에 있었다. 우리는 상하를 막론하고 너무도 바깥 정세에 어두웠었다. 강화담판의 제2일째에 우리 쪽 대표는 상대방에게 『조약이란 도대체 무엇인가』고 물을 정도였다.
따라서 조약의 유효기한을 밝혀두는 것도 몰랐었다. 치외법권이 뜻하는 바조차 알지 못한 채, 그냥 넘겨버렸다. 「조선은 자주의 나라이며,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새삼스런 조항이 무슨 복선을 가지게 될 것인지를 전혀 알지도 못했다.
똑같이 개항을 강요했지만, 그것을 요구한 미국과 일본과의 자세도 전혀 달랐다. 미국은 극동에서 어떤 야욕을 채우기 위해서 「흑선」을 보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처음부터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서 조선의 개항을 재촉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잘못은 결국 우리 나라가 너무나도 어리석었고, 약했다는데 있었다. 개항이란 언젠가는 있어야할 일이었다. 또 개항 그 자체는 조금도 나쁠 것이 없었다.
개항1백년. 그동안 조선 천지에도 엄청나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세계도 달라졌다. 그러나 강화의 교훈은 아직도 생생하게 우리를 일깨워 주는바 크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