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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충기 부장의 삽질일기] 씨앗봉투 세 개는 왜 택배가 안 되는겨?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반팔 입고 다녀도 될 날씨로구나. 씨앗 사러 종로오가에 나갔다. 1시간 이내면 웬만하면 걸어 다닌다. 전시회 문 여는 날이라 인사동부터 들렀다. 오랜만에 만난 이들과 갤러리에서 수다를 떨다 나왔다. 낙원상가, 탑골공원 뒷골목, 세운상가 앞을 지나니 광장시장 입구다. 순대국밥, 빈대떡, 칼국수, 대구내장탕… 시장은 아저씨 입맛의 천국이다. 서푼짜리 선심 좀 써보겠다고 손님 없는 좌판에 앉았다. 쥔장의 연식이 아리송하다. 사장님아줌씨라고 부르면 서비스 순대 몇 쪽 썰어내겠고, 할마씨라고 부르면 국자 집어던지겠다. 푸근한 아지노모도 오뎅국물이 폴폴 김을 내며 끓고 있다.

나손님: 거그 국물에다 국수 좀 말아줘유.
쥔아짐: …
나손님: 순대골목에 김밥집이 많이 생겼네유.
쥔아짐: …
나손님: 여그가 은제 이렇게 된규?
쥔아짐: …
나손님: 저그 귀탱이에 마약김밥집 하나만 있었잖유?
쥔아짐: …
나손님: 작년부텀 늘어난규?
쥔아짐: …
나손님: 재작년부텀?
쥔아짐: …
나손님: …
쥔아짐: …
나손님: …
쥔아짐: 꽤 됐슈.
나손님: …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말 없이 국수만 먹었다. 쥔아짐의 ‘꽤’가 언제쯤인지 끝내 알 수 없었다. 오천 원짜리를 꺼냈더니 천원을 던져주었다.

나손님: 잘 먹었구먼유.
쥔아짐: …
나손님: 많이 파셔유
쥔아짐: …

에잇 할마씨 같으니라구. 아저씨는 바이샤 수드라도 못되는 불가촉천민이더냐.

인도 양쪽으로 꽃과 묘목을 파는 노점들로 꽉 찼던 종로오가 남쪽 길은, 이제 절반 넘게 아웃도어 매장들이 차지하고 있다. 왕창?폭탄?원자탄?수소탄세일, 폐업정리, 눈물의 고별전… 매장엔 세일?정리?고별과 유사어인 아저씨들이 그득하다. 우리도 갈 데가 있단 말이다.

계절은 어쩔 수 없어, 몇 남지 않았지만 종묘상엔 봄 찾아 나온 이들로 북적인다. 뭘 고를까 한참을 두리번거렸는데 주인도 종업원도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

아 아저씨~.

갑자기 가게 한쪽이 시끄러워졌다. 종업원과 손님이 다투고 있다.

그손님: 해달라니까요. 저짝 가게선 해줬단 말요.
종업원: 안 돼요. 배보다 배꼽이 더 크잖아요.
그손님: 사람 무시하는 거요? 오도바이만 부르면 되는데.
종업원: 손바닥만 씨앗봉투 몇 개 사고 택배로 보내달라면 우리는 뭐가 남아요.

해롱거리는 그손님은 낮술에 혀가 꼬여 있었다.

아 아저씨~.

그때 내 앞으로 파랑색 플라스틱 바구니가 푹 들어왔다. 쥔아짐이 이런저런 씨앗봉지로 꽉 찬 내손아귀를 보고 있었다. 오늘 나보고 웃은 첫 분이다. 아유 왜 그걸 들고다니셔요. 여기다 담아놓고 고르셔요.

지갑이 두툼하면 아저씨도 대접받는다.

종업원: 마이 사셨네요.
나손님: 욕심이 많어 그류.
종업원: 뿌리고 남으면 냉장고 야채보관칸에 넣어두세요.
나손님: 가을에두 쓸 건디 암데나 던져놓으믄 되쥬.
종업원: 시원한데 두면 몇 년 뒤에도 싹 잘 터요.
나손님: 고들빼기를 지금 부어두 되는규?
종업원: 봄에 뿌리면 뿌리까지 먹고 가을에 뿌리면 이파리만 먹어요. 그런데 이걸 다 뿌리시게요?
나손님: 다섯 평에 쓸라구 허는디.
종업원: 이거 10그람 봉다리는 많아요.
나손님: 우쩌믄 되것슈.
종업원: 1그람짜리 작은 걸로 하세요.
나손님: 그류 두 봉다리.

다 하니 6만2000어치다. 2000원짜리를 산 덕에 고들빼기 값 1만1000원이 굳었다.

작년에는 많이 샀다고 1000원짜리 상추 하나 그냥 주더니 올해는 국물도 없구나.

아저씨처럼 늙어가는 1호선을 타고 오는 길, 끄덕끄덕 조는 아자씨들이 객석에 그득하다.

아저씨도 삼월은 좋다.

안충기 기자 newnew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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