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위험에 빠지면 오바마 깨우는 여인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왼쪽부터 수전 라이스, 리사 모나코, 케이시 러믈러.

2008년 출범 초기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백악관은 ‘보이 클럽(boys club)’으로 불렸다. 참모의 대부분이 남성들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6년이 지난 지금 풍경은 달라졌다. 여성 참모의 수가 늘었다. 특히 국가안보 및 대테러 분야에선 사상 처음으로 여성들이 최고 직위를 차지하고 있다.

 웨스트윙(백악관 서관으로 대통령 집무실과 비서실이 있는 곳)의 여성 트리오로 불리는 수전 라이스(49) 국가안보보좌관, 리사 모나코(46) 국토안보·대테러보좌관, 케이시 러믈러(42) 수석법률고문이 주인공이다.

 이달 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크림반도에 군대를 기습 투입했을 당시 백악관은 사진 한 장을 공개했다. 오바마 대통령과 이들 3명이 소파에 나란히 함께 앉아 서류를 들고 토론하는 장면이었다. 이 사진은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의 국가 안보 정책을 40대 여성 세 명이 주무르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라이스 보좌관과 모나코 보좌관은 밤 사이 미국의 국가 안보에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오바마 대통령의 잠을 깨우는 권한도 갖고 있다.

 셋 중 오바마 대통령과 인연이 가장 오래된 건 라이스 보좌관이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의 인맥인 라이스는 공화당 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콘돌리자 라이스와 견줘 ‘민주당의 라이스’로 불려왔다. 2008년 대선 때 일찌감치 오바마 지지를 선언하며 선거 캠프에 합류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라이스를 깊이 신임해 흑인 여성으론 최초로 유엔 주재 미국대사에 임명했으며, 힐러리 클린턴의 뒤를 이어 국무장관직도 맡기려 했다. 하지만 2012년 9월 리비아 벵가지 주재 미 영사관 피습사건을 “우발적 사건”이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공화당의 표적이 되자 의회 청문회가 필요 없는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백악관에 입성했다.

 모나코 보좌관은 오바마 대통령의 하버드대 로스쿨 후배다. 지난해 3월 지금의 자리에 임명됐다. 모나코 역시 처음엔 중앙정보국(CIA) 국장의 후임으로 유력했다. 성사됐으면 CIA 최초의 여성 국장이었다. 그러나 벵가지 영사관 피습 당시 법무부 국가안보국장으로 해당 업무를 담당했다는 이유로 라이스와 마찬가지로 백악관 직책으로 우회했다. 지난해 보스턴 마라톤 폭발사고 때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회의하는 장면이 많이 찍혔다.

 러믈러 고문은 백악관의 숨은 실세다. 에너지 회사 엔론의 회계부정사건 당시 주임검사로 일한 그는 백악관에 들어오기 전까지 오바마 대통령과 별 인연이 없었다. 정부 출범 초 백악관 법률고문단의 일원으로 일해 오다 2011년 6월 로버트 바우어의 뒤를 이어 수석고문직을 맡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위기의 순간마다 그의 법률 조언을 깊이 신뢰한다고 한다. 그동안 몇 차례나 사의를 밝혔지만 대통령이 조금만 더 자리에 있어 달라고 요청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함께하는 업무가 많다 보니 세 여성은 종종 러믈러 고문의 방에서 수다를 떨 만큼 친하다. 특히 러믈러와 모나코는 주말이면 함께 구두 쇼핑을 할 정도다. 국가 안보를 다루는 세 여성의 자리는 백악관 내에서도 전통적으로 남성이 맡아 왔다. 라이스 보좌관의 경우 척 헤이글 국방장관, 마틴 뎀프시 합참의장, 존 브레넌 CIA 국장 등이 참석하는 백악관 상황실 회의를 주재한다. 라이스는 “회의가 열리면 내가 여성이라는 걸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다”며 “남성이 이 직책을 더 잘한다는 건 편견”이라고 말했다.

워싱턴=박승희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