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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충기 부장의 삽질일기] 저랑 농사 한번 지어보시죠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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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충기 기자입니다. 중앙일보 섹션&디자인 부장입니다. 주초에 병원에 갔습니다. 담당 의사가 연초에 수술한 부위의 엑스레이를 보더니 골프 쳐도 되겠다고 하더군요. 속으로 ‘웬 골프’했죠. 맨땅 노동이 좋아 잔디밭 자치기는 아예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온라인 중앙일보에 손바닥만 한 땅뙈기 하나 얻었습니다. ‘삽질일기’를 일굴 밭입니다. 저랑 올 한 해 농사 한번 지어보시죠.

차를 몰고 가는데 경찰이 손을 들면 저는 흠칫합니다. 켕기는 구석이 있거든요.

- 잠시 검문검색 있으실 게요. 트렁크 좀 열어주시렵니까. (이렇게 말하지는 않겠죠?)

이러면 저는 꼼짝없이 걸립니다. 차 뒤에 삽 톱 낫 같은 거시기한 물건들이 굴러다니거든요. 흙 묻은 장화도 밀짚모자 아래 숨어있습니다. ‘찍고 썰고 묻을’ 연장들과 머리 박박 민 후줄근한 아저씨, 모자까지 푹 눌러쓰고 있으니 이거 보나마나 ‘유력한 용의자’지요.

저 삽질합니다. ‘헛짓’ ‘쓸데없는 짓’이 아니라 진짜 땅 파는 삽질 말입니다. 매년 버드나무 가지에 물이 오르기 시작하면 몸이 근질근질합니다. 몸을 쓰고 싶어 환장하는 거지요. 주말농장을 한지 15번째 봄입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농사를 100% 늘렸답니다. 5평에서 10평으로(-.,-;). 이맘때면 씨 뿌리러 오라고 농장 주인이 문자를 넣어주는데 올해는 아직 소식이 없더군요. 지난 주말, 궁금하기도 하고 집에 있기엔 볕이 미치도록 좋아서 밭에 나갔습니다. 배낭에 호미 한 자루 찔러넣고 농장 길 따라 올라가니 주인장이 동네친구들과 정자 앞에 앉아 노닥거리고 있습니다. 5년째 만나는 얼굴입니다. 저처럼 뚜껑을 밀어버린 박박 동지입니다.

나: 벨 일 읎으신규?
쥔: 뭔일 있다구 벌써 오셨슈?
나: 콧구멍이 간질간질해서 왔쥬.
쥔: 아직 때가 아닌디.
나: 땅은 다 녹은 거 같은디.
쥔: 바람이 아직 차잖유.
나: 언제 문 열뀨?
쥔: 이번 주나 담주나 날씨를 봐야쥬. 근디 로타리는 칠뀨?
나: 작년에는 내 밭만 빼 놓구 칠 수 읎다더니 선심 쓸라구 그류?
쥔: 걍 물어본규.
나: 가을에 다 뽑아 냈으니 확 밀어버려유.
쥔: 그류. 남들 칠 때 같이 해야 허는규.

객쩍은 소리 한바탕 하고 밭을 돌아보니 지난해 부처 먹은 땅에 대파 싹이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지난 계절 다 거뒀다고 생각했는데 뿌리가 살아있었나 봅니다. 부추가 보이지 않네요.

나: 아자씨가 로타리 친다구 혀서 부추를 저그 밭둑에 다 옮겨 심었는디 누가 다 쌔벼간규?
쥔: 뭔 소리래유. 아직 싹 나올 때가 안 된 거쥬.
나: 저 짝엔 꽃두 죄 피고 난리부르슨디.
쥔: 여그가 산골짝 아뉴, 구룡산.

서울읍내가 눈앞에 보여도 산은 산인 모양이네요. 장화에 흙이 척척 달라붙습니다. 저 깊은 땅속까지 녹았나 봅니다. 곧 흙이 고슬고슬해지고 아지랑이 스멀스멀 날리겠지요. 옆밭에서는 땅을 기던 채소들이 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손마디 관절을 우두둑 와드득 꺾어봅니다. 삽질의 계절이 왔네요.
살맛납니다.

안충기 기자 newnew9 @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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