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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아낀 선조들] 송이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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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현대는 시간에 정확하게 맞추어 사는 사람을 요구한다. 그런 사람일수록 현대인이라고 하거나 더 나아가 문명인이라고 한다.

정확하게 시간을 측정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현대인의 삶과 비교해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정확한 시각은 그리 필요하지 않았다.

해가 머리 위에 뜨면 만나자고 하거나, 날이 따뜻하여 개구리가 뛰어 나오면 씨앗을 뿌리는 등 자연의 시간을 따랐다.

물론 인위적으로 시간을 나누어 측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관료들과 왕이라면 정시에 출근하거나 또 신료들과 회의를 해야 하므로 정확한 시각이 필요하였다.

누가 시간을 측정하고 또 알려주는가. 이는 반드시 하늘의 변화(天文)를 읽을 수 있는 하늘의 아들(天子)만이 할 수 있었다.

왕은 천문을 관찰하고 다시 이를 백성들에게 알리는 집행자였다. 이미 조선전기에 세종은 수많은 천문관측기구를 제작하고 해시계.물시계를 만들어 정확한 시각을 백성들에게 알려주었다.

17세기 중반 조선에서는 또 하나의 획기적인 시계가 만들어졌다. 전통적인 물시계에서 탈피해 서양식 기계 장치를 도입한 자명종이었다.1669년 송이영이 제작한 시계가 그것이다.

이에 앞서 효종 임금은 새로운 천문시계 제작에 힘을 쏟고 있었다. 홍처윤이라는 사람에게 일종의 시계인 '혼천의' 제작을 의뢰하였으나 정확하지 못하자 다시금 손재주가 있다고 알려진 김제군수 최유지(崔攸之)에게 혼천의를 만들도록 하였다.

1657년(효종 8년) 드디어 물을 동력으로 하는 혼천의가 제작되었다. 기계는 성공적이었지만 동력으로 이용되는 물의 부피가 겨울과 여름에 일정하지 않아 문제를 일으켰다.

이로부터 10여년이 흐른 1669년 10월 24일 송이영은 서양식 자명종의 원리를 이용한 천문시계를 제작하였다.물을 동력으로 쓰지 않고 추의 운동을 에너지로 사용한, 진일보한 장치였다.

주 동력원인 두 개의 추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시각을 알려주는 톱니 바퀴들을 회전시켰다.

12시각을 나타내는 표시판이 붙어 있어 시계틀의 창문 앞에 자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었다.

또 나무 인형을 세우고 옆에 종을 두어 매 시각마다 인형이 종을 치게 했다. 전통적인 자격루가 물을 이용한 자동시보 장치였다면 송이영의 시계는 물 대신 추의 운동에너지를 활용한 자동 시보장치였던 것이다.

후일 영국의 유명한 과학사학자 조셉 니덤은 송이영의 혼천시계야말로 매우 정교한 장치로 세계의 귀중한 과학 유물 중 하나라고 칭송한 바 있다.

그러나 송이영 이후 조선의 시계는 별다른 발전을 하지 못하였다. 천상(天上)의 움직임이 지상의 인사(人事)와 밀접하다는 생각 때문에 시각의 정확한 측정은 궁중 행사에 적합한, 길시(吉時)를 선택하는 데 주로 활용되었을 뿐이었다.

조선의 산업화가 유럽과 같이 시간을 따져 노동을 요구할 만큼 진행되지도 않았고, 유럽의 귀족들처럼 장식과 신분의 상징으로 시계를 수집하던 유행도 없었던 탓이다.

김호 서울대 규장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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