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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0)전국학련-나의 학생운동 이철승<제47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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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해방직후 건국문제와 찬탁·반탁을 둘러 싼 공산진영과 민족진영의 극한적인 대립 속에서 정상화를 찾지 못한 「캠퍼스」는 46년 초여름부터 또 다른 하나의 쟁점-국대안 문제를 놓고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기 시작했다.
46년8월22일, 미군정장관 「러치」(Archer·Lerch) 이름으로 공고 된 「미군정법령 102호」가 『경성대학과 9개의 전문학교를 통합하여 종합대학교로 서울대학교를 설립한다』고 밝힌 것이 발단.
서구식 민주교육의 종합대학 구현을 목표로 한 「국립 서울종합대학교」설치안에 대한 반대투쟁은 교육적 측면에서의 순수한 찬반논쟁이라는 초기의 양상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학원질서 파괴의 목적으로 이용되면서 좌우익투쟁의 한 「이벤트」를 형성했다. 서울대학 설치안에 관한 「군정법령102호」는 46년8월22일에 공고되었지만 「국대안과동」의 시작은 이미 문교부장 전억겸이 「국립서울대학교취지문」을 발표한 7월13일로 올라가게 된다. 설립취지문에서 지적된 이점은 다음과 같다.
①기존학교건물과 시설을 최대한도로 활용할 수 있다. ②교수 등 인적자원을 능률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③국가재정상 합리적이다. ④학자양성에 적합하다는 것 등.
그러나 반대입장을 표시하는 인사와 학생들은 ①종합대학 그 규모가 너무 방대해서 운영에 적지 않은 지장이 있다. ②관선이사회 구성이 반민주주의적이라는 이유를 내세웠다.
특히 이사회의 구성이 문교부장, 동 차장, 고등교육국장 등 (미군과 한국인 책임자 각 3명)6명으로 하고 그 밑에 총장·부총장·사무국 등을 둔 데서 반발은 더 컸다.
그것은 학원의 자유를 말살시키는 조치로 규탄됐다.
군정기간에만 잠정적으로 관선 이사회를 둔다는 단기가 붙어있긴 했지만 오해를 살 수 있는 충분한 요인은 됐다.
더우기 경성대학총장이었던 「안스테드」(Harry·B·Ansted)가 서울대학교총장으로 임명된 사실도 비난의 대상이 됐다.
미 군정하에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국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이렇듯 처음에는 제도와 그 운동을 둘러 싼 지반여론은 대부분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점차로 국대안에 대한 대안여론이 전국적으로 번지자 좌익은 『미군정을 궁지에 몰아넣고 38이남을 교란시키고 세력확장의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해 국대안 반대운동을 조직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국대안의 찬반논쟁은 좌익에 의해 그 순수성을 잃고 만 것이다.
사실 우리는 처음에는 영문을 몰랐다. 해방이 되었으니 미국식제도도 무방하리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전국의 각 학교가 일제히 등록거부, 맹휴, 폭력 등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국대안 반대의 선풍은 조선공산당의 지령 없이는 순식간에 그렇게 파급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학원소요는 그 실인즉 공산당의 「국대안 반대 투쟁 5인 소위원회」에 의해서 조종됐다.
당시 「공청」지방부장 겸「공청」중앙상임위원이었던 조혜준씨는 다음과 같이 당시를 증언한다.「국대안반대투쟁 5인 소위원회」는 강문석(공산당청년부장) 김영준(「공청」중앙조직부장) 조희영(「공청」중앙선전부장, 「민책」전국위원장) 문일민(「공청」중앙상임위원), 박광희(「공책」서울시책임비서) 등이 그「멤버」다.
46년8월말께(?) 찌는 듯 무더웠던 어느 날, 나는 소공동 근택 「빌딩」(전 경향신문사옥)의 박혜영 사무실에서 이들 5인 소위 「멤버」가 진지한 의견을 나누고 있던 광경을 목격했다.
강문석이 서두를 꺼냈다. 『지난 22일 국대안이 드디어 법령으로 공포됐습니다. 이는 미국이 이 나라에 식민지 정책을 쓰는 게 분명합니다. 우리 공산당원은 모든 힘과 조직력을 동원, 이를 분쇄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음 김영준의 주장은 공산당의 속셈을 그대로 드러냈다.
『전문학교를 모아 종합대학을 만들면 혁명의 기반을 잃게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조직적으로 동원할 집단이 학생들 이외에 또 얼마나 있겠습니까? 물론 노동자들을 동원할 수 있는 「전평」을 비롯, 수많은 단체를 조직해 왔지만 학생들보다 더 효과 있는 좋은 혁명의 추진세력은 없습니다. 종합대학이 되어 모든 권한이 미군정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되면 만사는 끝입니다. 그 많은 학생들에게 세포조직을 못하게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음모를 꾸며나갔다. 「국대안반대5인소위」의 비밀회의에 무상 출입했던 조헌준씨의 회고는 국대안 투쟁이 공산당의 치밀한 전략전술에 의한 것임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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