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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우스 vs 관객모독 … 전설이 된 무대 다시 열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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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2014년 다시 무대에 오른 연극 ‘에쿠우스’(왼쪽)와 ‘관객모독’. 한 세대를 훌쩍 넘긴 세월 동안 관객들을 만나며 현대 사회의 실체에 대한 문제의식을 일깨웠다. 빨려들 듯 몰입하게 만드는 강렬한 재미도 이들 작품의 특징이다. [사진 극단 실험극장, 극단76단]

전설이 돌아왔다. 연극 ‘에쿠우스’와 ‘관객모독’. 각각 1975년과 78년 국내 초연됐던 두 작품이 다시 무대에 올라왔다. 두 작품을 초연했던 극단 실험극장과 극단76단이 각각 4년, 5년 만에 재공연한다. 40년 가까이 생명력을 이어왔을 만큼 해석거리가 많은 작품들이다.

 # 잃어버린 원초적 정열, ‘에쿠우스’

 박수 소리의 무게가 달랐다. 연극이 끝났을 때 관객들은 아픈 박수를 쏟아냈다. 인간의 원초적 정열. 그 힘을 정면으로 맞닥뜨린 충격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배우들의 에너지에 압도당했다는 것은 도리어 부차적인 일이다.

 14일 서울 필동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에서 막을 올린 ‘에쿠우스’는 영국 극작가 피터 셰퍼의 동명 희곡이 원작이다.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가 말 여덟 마리의 눈을 쇠꼬챙이로 찌른 17세 소년 알런의 비밀을 추적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원작자이기도 한 피터 셰퍼는 ‘에쿠우스’로 73년 토니상 극본상을 받았다. 알런과 다이사트 역은 배우들 사이에서 로망으로 통하는 배역이다. 75년 국내 초연 이후 강태기·송승환·최재성·최민식·조재현·정태우 등이 알런 역을 거쳐갔고, 김동훈·신구·정동환·김흥기·송승환·조재현 등이 다이사트 역으로 출연했다. 올해 무대에선 지현준·전박찬이 알런 역을, 안석환·김태훈이 다이사트 역을 맡았다.

 이번 공연은 ‘19금’이다. 한국에서 공연하는 ‘에쿠우스’로는 처음이다. 배우들의 전라 연기 분량과 노출 수위를 모두 피터 셰퍼의 원작 그대로 따랐다. 노출의 강도는 세지만 선정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에쿠우스’에서 벗은 몸은 성적 대상물이 아니다. 연출을 맡은 극단 실험극장 이한승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 모두가 현대인이 돼서 놓친 원시의 세계를 표현하는 장치”다.

 라틴어로 말(馬)을 뜻하는 ‘에쿠우스’는 소년 알런에게 신이고, 성(性)이다. 위선적이고 삭막한 현대 사회에서 그가 찾은 희열의 경지이자, 피난처다. 분명 왜곡된 허상이지만, 에쿠우스를 향한 정열은 순수하고 강렬하다. 극 말미 알런을 ‘치료’한 다이사트가 느낀 상실감은 기성 세대가 안고 사는 무력감과 허탈감을 상징한다. “결과적으로 내가 한 일은 알런을 유령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란 그의 대사가 이미 정열을 잃고 ‘유령’이 돼버린 관객들에게 뜨겁게 꽂힌다. 여운이 길다.

 ▶연극 ‘에쿠우스’=5월 17일까지 서울 필동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 19세 이상 관람가, 4만원, 02-889-3561.

★ 5개 만점 ☆는 ★의 반 개

★★★★☆(강태경 이화여대 교수) 솔직한 누드 연기가 극이 함축하고 있는 원시적 본능을 강렬하게 표현했다.

 # 말장난 세상을 비꼬다, ‘관객모독’

 줄거리도, 무대장치도, 소도구도 없는 연극이다. 기승전결에 길들여진 관객들은 처음엔 당황하지만, 이내 새로운 재미에 빠져든다. 기국서 연출가는 78년 초연 때부터 ‘관객모독’ 연출 자리를 고수 중이다. 초연 때도 무대에 섰던 그의 동생 기주봉이 이번에도 주연을 맡았다.

 관객들을 향한 욕설과 물세례가 ‘관객모독’의 트레이드 마크지만, ‘모독’의 핵심은 아니다. 배우들의 비논리적인 대사 자체가 관객을 모독한다. 학술대회장에서 논문 발표를 하는 듯 진지하게 이어지는 대사. 한두 문장 그럴듯해 보여 귀를 기울여 보지만, 결국엔 말장난이다.

 “아울러 무엇보다도 자기 나름대로의 변증법적으로 깨달았을 꿰뚫어보고 아셨겠죠?”식으로 단어를 뒤죽박죽 엮고, 뜬금없이 외국어를 섞어 쓰는가 하면, 띄어쓰기를 파괴해 엉뚱한 효과를 낸다. 페터 한트케의 원작에는 없는 극중극 부분에선 말장난이 더욱 심해진다. 등장인물들이 극 진행과 아무 관련없는 논문식 대사를 주고받는다.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연”(남), “극만이!”(여), “연극입니다. 시간과 무관한 연”(남), “극만이!”(여),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습니다. 시간과 관계없는 연”(남), “극만이!”(여), “스스로 충족되는 연극입니다. 시간과 무관한 연”(남), “극만이!”(여) 식으로 연결된 대사가 마치 이름이 ‘극만’인 남자와의 대화처럼 이어진다.

 이렇듯 도저히 알아들을 수도 없고, 알아들을 가치도 없는 소리의 조합은 90분간 계속된다. 청산유수 흐르는 현학적인 대사는 언어유희 현대사회를 풍자하는 도구다. 무거운 주제지만, 과감한 욕지거리 덕분인지 어둡진 않다.

 ▶연극 ‘관객모독’=6월 1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3만∼4만원, 1588-5212.

5개 만점 ☆는 ★의 반 개

★★★★☆(오경택 연극연출가) 여전히 도발적이고 유효한 작품. 지적이면서 본능적이고, 날카로우면서 묵직하다.

이지영 기자
[사진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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