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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조 시기 ‘여성 군자’ 사주당 이씨 기록 찾았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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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당 이씨를 쓴 가장(家狀).

조선시대 현모양처이자 최고 여류 지성으로 꼽혔던 신사임당에 버금갈 만큼 학식과 부덕이 뛰어나 여성군자로 불린 사주당 이씨(1739~1821)에 관한 기록이 발굴됐다. 영조~정조 시대 인물인 이씨는 동해모의(東海母儀, 해동 어머니의 모범)라는 호칭을 받기도 했다. 전 성리학 수준이 일정한 경지에 올라 영조의 경연관(經筵官)이었던 한원진·송명흠 같은 호서(湖西)거유(巨儒)의 칭찬을 받았다. 특히 남당 한원진은 사주당이 12세인 1751년 사망한 사람이어서 그가 10대 소녀인 사주당을 칭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사주당이 영재 소녀였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사주당은 또 후에 호조참판이 되는 이양연, 순조 때 진사 3등으로 합격하는 이면눌 같은 이가 성인이 된 뒤 가르침을 주기도 했다. 사주당은 경사(經史)를 주로 연구했으며 결혼 직후엔 당호를 희현당(希賢堂)으로 했다가 ‘주자(朱子)를 배운다’는 뜻인 사주당(師朱堂)으로 바꿨다.

 그는 남편 유한규와 성리학 토론을 했고 붕당의 다툼(당쟁)에 대한 견해도 드러내 성리학 학식에서 선비들과 어깨를 견줬다. 특히 서인(西人)이 노론·소론으로 분열된 데 대해 중심 인물인 노론의 송시열과 소론의 윤증 모두를 비판하는 중립적 면을 보여 주기도 했다. 나아가 극심한 붕당(朋黨) 쟁론의 원인을 ‘극원(克怨)’으로 지적했는데 이는 ‘남에게 이기기를 좋아하며 원망한다’는 뜻이다. 조선말기 이건창이 『당의통략(黨議通略)』에서 “시비가 불분명한 일로 거국적인 붕당 시비가 200년간 계속됐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런 내용은 사주당의 아들이자 『언문지』 『물명고』의 저자로 유명한 조선 후기 백과전서파 실학자 유희(柳僖)가 쓴 『선비숙인이씨가장(先?淑人李氏家狀)』(어머니 사후 쓴 기록?사진)에 나온다. 『가장』은 2004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된 유희의 문집 『문통(文通)』 가운데 『방편자문록(方便子文錄)』권 2에 들어 있었는데 본지의 요청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용만 책임연구원이 이번에 처음 완역했다.

 『가장』에는 ‘노년에 전후의 약간의 문초를 모아 태우고’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사주당이 여러 편의 저술을 했음을 의미한다. 그중엔 결혼 전에 쓴 『가례(家禮)』와 『가편여집』이 있다. 결혼 뒤엔 기거·음식에 관한 절도를 수집하고 경전 가운데 아이에게 적합한 내용을 부록으로 붙인 뒤 언문으로 풀어 책을 만들었다. 남편은 『교자집요』라는 제목을 달았다. 20여 년 뒤 62세에 사주당은 『교자집요』의 내용을 보충하고 재편집해 『태교신기(胎敎新記)』를 저술했다. 조선시대 유일한 태교서적이다.

 박용만 책임연구원은 “행장은 치우치지 않고 어머니 사주당의 참모습을 상세히 보여 주는 드문 자료”라며 “대부분의 조선 여류 지식인은 출가 뒤 남편의 후원으로 재능을 발현했지만 사주당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현모양처를 넘어 학인으로 자리 잡은 큰 인물”이라고 평했다.

사주당 이씨의 아들 유희가 남긴 문집. 그는 널리 알려진『언문지』와 『물명고』외에 100여 권에 가까운 문집인『문통』을 남겼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전시된 문통의 일부. 조용철 기자

여성 선비의 소중한 기록, 서울 고서적상에 팔릴 뻔
200년간 파란 겪은 유희의 『문통』과 사주당『가장』

사주당 사후 200년 가까이 그의 삶을 담은 『가장』은 파란을 겪었다. 책은 아들 유희의 문집인 『문통(文通)』에 남아 후대로 전해진다. 그 과정에서 문집이 직계로 전해지지 않은 듯하다. 사주당의 4대손에 이르러 막내 계통인 근영(近永)이 보관하게 된다. 1897년생으로 경기고보(지금의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족보에 따르면 1919년 독립운동에 참여해 옥살이를 했다. 이어 21년 23세엔 경북 예천에 세워진 영신의숙의 훈육교사가 됐다. 의숙은 42년 문을 닫고 근영은 해방 뒤 대창 학교와 동부국민학교(예천군 풍천리 우망초등학교, 현재 폐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문통』을 아꼈다. 문집을 재정리하고 필사했다. 그 과정에서 위당 정인보에게도 보여 줬다. 그러다 49년 6월 돌연 혈압으로 사망한다. 아들 래현(67)씨는 “문집 발간·정리에 많은 돈을 들여 남은 것이 없었다”고 말했다. 우망초등학교 앞 추모비에도 “사생활이 극히 궁핍했다”고 쓰여 있다. 『문통』은 홀로 남은 부인 권말연씨에게 남겨졌다.

 자식 셋에 먹고살기 힘들었던 권씨는 예천 남쪽 50리, 친정마을인 매천2리 안동 권씨 집성촌으로 들어왔다. 보리쌀 한 말을 주기도 얻기도 힘든 빈촌. 살 곳도 없어 곁방살이 처지였고 광주리를 이고 물건을 팔았다. 그러다 마을 서당이었다가 창고로 쓰이던 폐가로 들어갔다. 마을 주민에 따르면 100년쯤 된 폐옥 같은 곳에서 그들은 30여 년을 살았다. 부인도 문집은 애지중지했다. 궤에 넣어 방 안 벽에 쌓아 보관했다. 책을 아는 몇몇에게 가끔 빌려 줬을 뿐 손도 못 대게 했다. 래현씨는 “한 80권 정도 있었는데 빌려 준 책들이 다 돌아왔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그게 『문통』인지도 몰랐다.

 그 사이 사주당의 방계인 유기봉(67)씨가 문집을 서울로 갖고 왔다. 유씨는 “유희 할아버지가 유명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고등학교 시험에 출제될 만큼인 줄은 몰랐는데 대고모(권말연)가 이름을 널리 알리자고 해서 가져왔다”고 말했다. 방에 꽉 찬 책 가운데 반듯한 것들만 가져왔다.

 서울로 올라온 문집은 한때 고서적상에 흘러 들어갈 뻔했다. 그러다 1987년 어머니 권말연씨 사후 서울로 올라온 래현씨가 보관하게 됐다. 시간이 흘러 2003년 진주 유씨 문중의 일을 보는 유조호(79)씨가 『문통』의 존재를 알게 됐다. 유씨는 “가 보니 바닥에 책이 널렸는데 물에 젖고 곰팡이가 피고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지를 넣고 잘 말렸다”고 했다. 1년쯤 뒤 2004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문집을 넘겼다.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던 『문통』이 빛을 본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가장』이 완역돼 처음으로 사주당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다. 그런데 『문통』이 30년 넘게 보관돼 있었고, 100년도 넘었다는 그 집은 어떻게 돼 있을까. 지금은 외양간으로 쓰고 있다.

안성규 기자, 김석근 아산정책연구원 인문연구센터장 ask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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