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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제47화>전국학련|-나의 학생운동 이철승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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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병영②>
『살아야 하느냐, 죽어야 하느냐. 』「햄릿」은 이렇게 고민하였다지만 나는 『억세게 버티어 나가느냐, 바보노릇을 하느냐』는 문제로 밤낮으로 고민했다.
활발하고 적극적이면 일과 훈련이 더 고되었고 기합도 더 받아야했다. 나는 쏟아지는 기합과 배고픔을 면해볼 생각으로 요샛말로 바보 비슷한 고문관 행세를 해봤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육신 멀쩡한 놈이 무슨 수작이냐고 오히려 뭇매 대상이 됐다.
『도리없다. 이제부터는 이철승이가 어떤 놈인가 본때를 보여주자.』
이렇게 결심하고 그때부터 매사에 적극전법을 썼다. 왜놈들이 둘이서 끙끙대는 가마니를 나는 혼자서 들어 나르기도하고 말물통속에 머리를 쳐박고 재는 폐활량 검사때에는 다른 사람은 보통 40초나 1분이면 그만인데 나는 끙끙대면서도 오기로 2분30초를 견뎌냈다.
당시 이 기록은 우리 중대는 물론 연대 최고기록이었다. 운동시합이나 총검술 대항이 있으면 나는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시합에 상하가 있을리 없고 어디까지나 1대1인지라 나는 평소 갖추어 놓았던 유도(2단) 검도 (2단)등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어쩌다 실력으로 되지 않는 놈이 있으면 몸으로 부딪쳐서라도 때려 누였다.
이쯤되니 나는 기합 잘 받고 힘센 「죠오센징」으로 이름을 얻어 걸핏하면 불려 나갔다. 운동시합이다, 총검술대항이다 하여 급하면 나를 찾았다. 자연 식사도 잘 대접받게됐다.
l944년3월10일, 서울역전광장보다 넓은 「오오사까」의 「우메다에끼」(매전역)의 사단사열식에도 나는 김태규2등병(현재국회의원)과 함께 우리부대의 대표로 뽑혀 나갔다.
3월10일은 육군창설기념일. 화려하고도 큰 대판지구 사단장의 사열에 대비해서 사단예하 보병·포병·공병·고사포부대등이 동원됐고 기마부대사열명으로 나는 말을 타고 「우메다」역으로 갔다. 이윽고 사단장이 임석한 사열이 베풀어졌다. 대오속에 서있던 나는 다가오는 사단장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백마를 타고 늠름히 걸어오는 사단장은 다름아닌 영친왕 이은공이었다
일찌기 나이 11세때 나라를 빼앗긴 황태자의 몸으로 이등박문에게 볼모로 잡혀 일본에 건너온 영친왕. 일본 육군유년학교와 육사·육대를 나온 영친왕은 일본의 육군중장이 되어 바로 우리의 사단장이 돼 있었던 것이다. 내 앞을 지나가는 영친왕의 가슴에 단 훈장과 웃옷깃에 수놓은 황색바탕속의 별두개가 유난히 눈부셨다.
『나라 잃은 젊은이가 나라 잃은 황태자를 나라 뺏은 일본땅에서 만나다니…. 』참으로 그것은 야릇한 운명이었다. 순간 만감이 가슴을 스쳤다.
나는 현깃증을 느꼈다.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는 순간에 하마터면 큰 일을 저지를 뻔했다. 내가 탄 말이 갑자기 움직이며 대오를 벗어나는 게 아닌가.
그때까지만 해도 서툰 내 말 실력이라 쩔쩔맸다. 다행히 소화군조가 달려와 겨우 수숩됐다.
사열이 끝난 후 영친왕은 조선학병 20명을 사단본부로 따로 불러 훈시를 한 뒤 만두가 든 빵봉지를 나누어 줬다.
『이 근방에 우리교포가 많이 살고 있다. 그러나 일인들간에 평판이 나쁘다. 여러분은 조선내에서도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니 열심히 하여 일인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아달라-. 』 이렇게 말하며 더 얘기를 못했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을 것이지만 입을 다문 그는 우리들 병영생활에 그을리고 쪼들린 모습들을 찬찬히 훑어 보았다.
그의 눈에 눈물이 핑그르 도는 것이 보였다. 무슨 말을 더하고 더 들으랴. 나라 잃은 황태자와 나라 잃은 젊은이는 가슴과 가슴으로 대화했다.
부대에 돌아온 나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잠을 못 이루었다. 그 이튿날 나는 「니시무라」(서촌)중대장의 말당번이 됐다. 말당번은 매일 부대밖 맑은 공기를 마실수 있다는 점, 중대장과 가까와 질수 있다는 점은 좋았으나 남보다 일이 많고 늦게 식은 밥을 먹는 것이 나빴다.
특히 중대장의 숙소가 부대에서 2km쯤 되는 서쪽이어서 그곳까지 출퇴근 길에 말고삐를 잡고 가야 했다. 이 일이 더욱 싫었다.
서쪽은 바로 내 조국 내 고향이 있는 곳,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말고삐를 끌고 가노라면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괴었다.
조국과 고향은 얼마나 위대한 신앙인가. 해는 이미 서산에 지고 대지는 황혼에 물들 때에야 나는 막사로 돌아 온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황성옛터』 나 고복수의 『타향살이』,백년설의 『나그네 설움』을 부르는 것이 예사였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목욕탕 사건. 일본의 기후는 한겨울인데도 습기가 많아 추워도 으슬으슬 기분 나쁘게 춥다.
더구나 온종일 훈련과 기합을 받느라 땀이 뒤범벅이 되기 때문에 일과가 끝나고 나면 밥 다음으로 목욕생각이 간절하다.
1주일에 한두차례 목욕시간을 주지만 말이 목욕이지 물만 손에 적시다마는 정도다.
물은 적은데다가 그나마 계급순으로 들어가 2등병인 내가 들어갈 때 쯤이면 물은 이미 동이 난다. 식어 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끝에 하루는 고참병들이 들어가는 틈에 끼였다.
실내가 어두컴컴한데다 모두 다 머리를 빡빡 깎고 전부 옷을 벗고 있어 누가 누군지 알까닭이 없다.
나는 다짜고짜 들어가서 어느 놈을 밀어붙이고 뜨거운 물에 몸을 푹신 담갔다. 그리고 나와서는 바가지를 뺏어 마음껏 물을 들어 부었다.
세상 살 것 같았다.
그런데 옆에 바가지를 뺏긴 놈이 자꾸 째려 보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눈치를 챈 것이 분명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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