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세대 표적항암제 '타시그나' 백혈병 생존율 확 높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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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결코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라는 명언을 남긴 채 불치병으로 눈을 감은 영화 러브스토리의 여주인공. 그녀에게 ‘이 약’이 있었다면 얘기는 달라졌을까.

‘타시그나’라는 약이 있다. 혈액암인 만성골수성백혈병(CML·Chronic Myelogenous Leukemia) 환자에게 사용하는 2세대 표적항암제다. 암세포를 공격하지만 내성과 부작용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1세대 표적항암제의 한계를 극복한 첨단 신약이다. 암세포에 빠르고 깊게 침투해 성장을 억제하면서 생존율을 끌어올린다. 최근에는 느린 속도로 진행하는 CML 환자뿐 아니라 갑자기 발병해 빠르게 악화하는 급성림프구성백혈병(ALL·Acute Lymphoblastic Leukemia) 환자에게도 효과가 있다는 임상 연구가 국내 의료진에 의해 최초로 입증됐다. 대한혈액학회 성인급성림프모구 백혈병연구회가 주축이다. 연구를 주도한 서울아산병원 김대영(혈액내과·사진) 교수는 “더 많은 백혈병 환자가 골수이식을 받지 못하는 경우에도 약물만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줬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ALL 환자를 대상으로 화학항암치료와 함께 타시그나를 병행했을 때 환자의 3년 생존율이 57%까지 높아졌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1세대 표적항암제인 글리벡을 썼을 때 39%였던 생존율을 1.5배 끌어올렸다. 이 중 재발 없이 생존하는 비율은 더 높다. 글리벡은 49%였지만 타시그나는 74%로 나타났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90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한 이번 연구결과는 지난해 말 미국혈액학회 연례회의에서 발표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김 교수는 “부작용이 큰 화학항암치료나 방사능치료의 비중을 줄일 수 있을 것이란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ALL은 한 해 400~500명의 환자가 발생하는데 대다수가 소아와 사회활동이 가장 활발한 30~40대라는 점이 문제”라고 설명했다.

타시그나는 앞서 CML환자에서 진일보한 치료 효과를 입증했다. 먼저 만성에서 급성으로 악화하는 CML 환자의 비율을 1% 미만으로 낮췄다. 기존 표적항암제로는 4% 수준이다. 김 교수는 “급성으로 악화하면 치료비용은 억원 단위까지 넘어간다. CML의 주된 발병층은 사회·경제적 활동이 활발한 40~50대인데 노동에 대한 기회비용과 치료비로 부담하는 사회적 비용이 심각해진다”고 말했다. 약을 끊어도 더는 병이 악화하지 않는 완치까지도 바라본다. 김 교수는 “기존 치료제는 큰 암세포를 조약돌 수준으로 깨뜨렸다면 타시그나는 모래알이나 먼지 수준까지 깨뜨린다”고 말했다. 암세포가 작아질수록 면역세포는 암세포를 억제하기가 쉬워진다. 김대영 교수는 “약효가 강하면 부작용도 늘 것이란 우려가 있지만 타시그나는 치료기전이 같은 2세대 표적항암제 중에서도 부작용이 낮은 편이다. 부작용을 충분히 예상하고 조절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극복해야 할 문제가 있다. 아직 ALL 치료제로 승인받지 못해서다. 김 교수는 “희귀질환이라 환자가 많지 않아 대규모 임상시험에 어려움이 있다. 그렇지만 약 사용에 대한 권한을 쥐고 있는 건강보험공단과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이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가 임상시험을 위해 90명의 환자를 모집하는 데만 3년이 걸렸다. 보험에 등재되지 못하면 한 달 약값은 환자 1인당 약 300만원에 달한다. 약이 절박한 환자가 자신의 돈을 내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정부에서 승인해 주지 않아서다. 김 교수는 “젊고 건강했던 사람에게 갑자기 발병하는 ALL같은 희귀질환은 현실에 맞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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