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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의 6·25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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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그 무렵「포드」대통령은 초선 하원의원이었다. 1948년 35세의 나이로 의원에 당선되고, 또 바로 그 해에 결혼도 했었다.
6·25가 일어나던 1950년엔 의원생활 2년째를 맞는 해였다. 그는 새롭기만 한 정치무대에서 미국이 한국동란에 참전하게 된 과정을 인상깊게 지켜볼 수 있었다. 월남전에서도 그랬지만, 한국동란 때도 그는「독수리 파」로 알려져 있었다.
1952년엔 친히 한국전선을 방문한 일도 있었다. 그는 판문점에서 미군포로들이 교환되어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당시 참전장군이던「웨스트모얼랜드」와도 판문점에서 담소하며 전황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한국동란이「포드」대통령에겐 결코 생소한 일도, 모호한 경험도 아니었다. 그는 눈과 피부를 통해 그 뼈아픈 전쟁을 체험하고 느낄 수 있었다.
미군은 6·25 참전에서 3만4천명의 인명을 잃었다. 우리 국군의 희생에는 물론 비할 바가 못되지만, 연합군(「유엔」군) 보다는 무려 8배나 되는 희생이었다. 그것은 비록 미국의 국익을 위한 것이었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혈맹으로서의 우의를 잊을 수 없다.
필경 미국의 편에서도 그런 감회는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인지사태 이후 세계의 이목은 삽시간에 한반도로 쏠렸으며, 어느 때 없이 긴장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한편으로는 힘의 균형이 깨어지는 듯한 불안감마저 없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그런 공백과 진공상태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키신저」는 세계의 열강을 향해 재삼 경고를 다짐했으며「슐레진저」국방장관은 힘의 균형을 위해 전술핵무기의 대처를 공언했다.「포드」대통령은「외교」「국방」의 뒤를 받쳐 주는「엄호발언」을 잊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일들은 즉흥적이기보다는 신중하고 치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인상이다. 더구나 미국시민들이 한반도의 상황에 깊은 이해와 동정을 갖는 것은 더없이 반가운 일이다. 그들은 월남의 상황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차차 알게 된 것 같다.
요즘 동란 25주년을 보내며 백악관은 간소하나마 의식을 갖고 이날의 감회와 결의를 되새겼다고 한다.「포드」대통령은 몸소 방미중인 군 출신 한국의원들을 이 자리에 초청했다. 역시 한국전에 참가했던 미 의회의 의원들도 여기에 초청되었다고 한다.『리멤버! 코리언·워』(한국동란을 상기하자)-. 이것은 미국인의 귀와 마음뿐 아니라 세계인의 귀와 마음에도 쟁쟁히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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