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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3·1절에 돌아본 왕도와 패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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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3·1절 95주년을 맞으며 동북아의 지난 한 세기 역사를 되돌아보게 된다. 근자에 들어서 한·일 관계는 심히 불편해졌으며, 중국과 일본 사이의 영토분쟁은 물리적 충돌의 가능성마저 보이고 있다.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겪었던 열강의 각축이 재현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의 소리도 들린다. 이러한 동북아의 급진전된 긴장 국면은 2012년 말 아베 일본 총리의 취임 이후 계속 악화되고 있다.

 1868년 메이지유신은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국가체제의 서양화와 근대화에 성공한 모범 사례였다. 그러한 성공의 여세를 몰아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연달아 격파한 일본은 제국주의시대 열강의 반열에 오르게 되어 1910년 조선의 식민지화를 시작으로 중국 침공에 나서게 된다. 천황제를 기초로 한 군국주의 국가 건설에 성공한 일본으로서는 멈출 수 없는 행보였을 것이다. 중국의 신해혁명을 이끈 쑨원(孫文)은 1924년 세상을 떠나기 전 ‘일본은 서양패도(西洋覇道)의 앞잡이가 될 것인가, 동양왕도(東洋王道)의 아성이 될 것인가’를 신중히 생각해보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바로 1909년 사형대에 오르기 전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를 염원하며 남긴 유언, 그리고 3·1독립선언서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20세기 전체주의 독재체제의 공통적 특징은 지도자를 포함한 모든 국민이 그 체제의 포로가 된다는 것이다. 일본은 군국주의의 흥분과 내셔널리즘의 다이내믹스에 휩싸여 끝내 진주만을 기습하며 제2차 세계대전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는 제국주의시대의 막을 내림과 동시에 타율에 의한 두 번째 국가개조의 기회를 일본에 부여하였다.

 1945년 독일과 함께 민주화 제2의 물결에 동승한 일본의 국가개조와 발전은 참으로 놀랄 만한 성공이었다. 특히 눈부신 경제성장은 80년대에 이르러 타임(TIME)지 ‘JAPAN No.1’이란 표지가 상징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평화헌법, 민주정치, 고도성장의 삼각이 지탱하는 일본은 가히 왕도정치를 지향하는 ‘제2의 유신’에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아 마땅하였다. 그러한 일본이 아베가 집권하자 새로운 국가체제를 모색하겠다는 강렬한 자세를 취함으로써 그 파장은 국내외를 흔들고 있다. 무엇보다도 메이지유신으로 열강의 반열에 올랐던 제국시대에 대한 향수가 작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패도정치로의 회귀를 우려하는 시선이 아시아를 비롯한 국제사회에 확산되고 있다.

 아베 총리가 이렇듯 걱정스러운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상황의 변화에 대한 자연스러운 대응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경제의 20년 가까운 침체, 후쿠시마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 잦은 정권교체에 따른 정치적 불안정은 불안을 일상화하고 일본 사회의 활력과 자신감을 떨어뜨렸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유일 초강대국 시대가 끝나면서 중국이 제2의 경제대국이 된 데 이어 안보 차원에서도 미국과 대등한 위치로 다가가고 있다는 불안감 및 심리적 위축이 아베로 하여금 비상대책과 획기적 방향전환을 모색하게 한 것이다. 국제정치와 경제의 다극화에 대비하려는 국제사회의 적응 노력, 특히 일본·중국·한국 세 나라가 각기 시도하고 있는 적응의 움직임들이 과연 어떤 조합을 이루어 낼 것인지 걱정스러운 이 시대의 퍼즐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은 3·1운동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한·중·일 3국이 평화적으로 공존 공영하는, 인(仁)과 덕(德)을 으뜸으로 삼는 왕도정치의 지역화와 국제화를 도모하여왔다. 인의(仁義)를 가볍게 알고 무력과 권모로 국익을 추구하는 패도정치를 배격하면서 국제사회에서의 패권주의를 절제시키는 데 앞장서고자 한다. 우리는 미국이 제국주의 시대에 볼 수 있었던 전통적 패권국가가 아니라고 믿고 있다. 그러기에 한국·일본·중국은 각기 미국과의 새로운 공존관계를 수립하면서 동북아 3국 간의 생산적 이웃관계를 동시에 만들어가야 할, 새 시대를 향한 역사적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일본이 제국시대의 영광에 대한 향수를 뿌리치며 국제사회에서 도덕적 고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되고, 중국은 쑨원이 강조한 왕도정치의 표본이 되고자 국가목표를 가다듬는다면 한·중·일 3국은 미국과 더불어 21세기를 아시아·태평양시대로 만들어갈 초석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전통적 내셔널리즘의 사슬에서 벗어나 새 아시아공동체를, 그리고 지구촌의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는 국제정치의 창조적 다자연대를 함께 실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95년 전 3·1운동에서 꾸었던 꿈이 아니었겠는가.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