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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Sunday] 대표성 없는 합의는 또 다른 甲의 횡포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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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호 31면

한 학년에 10개 학급쯤 되는 학교가 있다. 어느 날 3반 반장이 다른 반을 돌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 반은 담임선생님이랑 야간 자율학습시간을 한 시간 줄이기로 했어. 다른 학교랑 학력격차를 줄이려고.”

다른 반 학생들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가뜩이나 학교 전체 평균이 떨어지는 상황이다. 3반 반장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한 시간 일찍 집에 가는 덴 조건이 있어. 바로 너네 반들도 우리랑 같은 시간에 하교해야 한다는 거야.”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나 나올 법한 상황이 현실에서도 생겼다. 민주당 을지로위원회는 2월 28일 롯데그룹과 유통부문 전반에 대한 불합리한 관행 및 불공정 행위 시정을 위한 상생협력 협약을 맺었다고 밝혔다. 핵심은 롯데마트의 영업시간을 밤 11시까지로 종전보다 1시간 단축하기로 원칙적인 합의를 이뤄냈다는 점이다.

여기엔 조건이 있다. 이마트와 홈플러스 같은 대형마트 3사가 포함된 회원 협의체를 통해 단축영업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 뒤 이를 동시에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네가 영업시간을 줄여야, 우리도 줄인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번 협약과 관련해 이마트와 홈플러스는 “이런 합의가 진행되는지조차 몰랐다”며 황당해한다. 롯데그룹 내 다른 계열사에서도 “너무 나갔다”는 의견이 나온다.

을지로위원회는 지난해 5월 발족했다. 이른바 남양유업 사태로 불거진 갑을(甲乙) 논란 당시 힘없는 을의 편이 돼주겠다는 취지였다. 성과도 많았다. 다양한 노동현장을 찾아 약자를 도왔고, 법률상담과 토론회를 통해 을들에게 힘을 보탰다. 수십 건의 교섭타결도 일궈냈다.

세상에 절대적인 갑이 있을까. 을지로위원회는 을을 위한다지만 기업엔 분명 갑이다. 위원회 활동을 두고 “과도한 기업 때리기 아니냐”는 반발도 나온다.

더구나 대형마트 영업일·영업시간 규제의 효과와 관련해서도 의견이 갈린다. 대형마트의 영업을 인위적으로 제한해도 그 효과가 영세상인에 미치지 않는다는 게 중론이다. 무작정 영업시간을 줄이는 일이 서민과 소비자에게 도움이 된다고 장담할 수 있나.

지금으로선 을지로위원회가 대형마트에 을이 되길 강요하고 있는 형국이다. 여기서 짚어볼 부분이 있다. 을지로위원회는 국회법에 따른 정식 상임위가 아니라 민주당 내에서 활동 중인 위원회다. 롯데마트 역시 대형마트 업체 중 일부다. 굳이 대표성을 따진다면 을지로위원회보다는 국회가, 롯데마트보다는 27개 유통업체가 회원으로 있는 한국체인스토어협회가 해야 할 합의다.

물론 이번 합의가 나쁜 의도에서 이뤄진 건 아닐 것이다. 을지로위원회 입장에서 이번 합의는 다른 마트들에 “롯데도 하는데 왜 안 하느냐”는 식의 압박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보편적인 법률을 만들고 정권 획득을 목표로 정책을 만드는 수권 야당의 선택으로선 왠지 군색해 보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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