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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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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김회룡
김회룡 기자 중앙일보 차장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부장대우

사촌은 20여 년 전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났다. 잘나가던 대학 동창들 여럿이 일시에 짐을 쌌다. 교육 문제가 제일 컸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조카들은 뉴질랜드에서 대학을 나오고, 각각 호주와 한국에서 일한다.

 이민 생활 내내 사촌은 “뉴질랜드는 재미없는 천국,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라며 한국을 그리워했다. 매사 악다구니쳐야 하는 고단한 삶이지만 그게 한국 사회 특유의 활력과 역동성으로 이어진다는 얘기였다. 한국을 떠나서 하는 말이니까 한계는 있지만, 그의 친구들도 한결같았다. 농반진반 “돈만 좀 있으면 한국처럼 재미있게 살 수 있는 나라도 없다”고들 했다. 이 중 몇 명은 자녀가 장성한 후 한국에 돌아왔다.

 그런데 그것도 옛날 얘긴가 보다. 최근 한 모바일 여론조사 결과가 눈길을 끈다. ‘다시 태어난다면,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다’(57%)는 답이 ‘태어나고 싶다’(43%)보다 앞섰다.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답은 20대가 60%로 가장 많았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은 이유는 과도한 경쟁, 치열한 입시, 스펙 쌓기 등이었다. 가장 암울한 한국의 사회현실로는 ‘정치’가 꼽혔다. 응답자의 70%가 한국은 공정하지 않고, 양극화가 심각하다고 답했다(두잇서베이 조사).

 러시아로 귀화한 후 이번 소치 겨울올림픽에서 선전한 빅토르 안에 대한 젊은 세대의 긍정적인 반응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여느 때처럼 ‘배신자’로 재단하는 대신 ‘국가도 선택’이라는 성숙한 의견이 주를 이뤘다. 한국사회 불공정의 상징 같은 그가 남들의 영웅이 돼서 조국에 ‘한 방 먹이는’ 반전드라마에 아낌없이 박수 쳤다. 뿌리 깊은 스포츠민족주의가 일시에 허물어진 듯했다. 물론 이는 젊은 세대의 탈국가주의·탈민족주의 성향을 입증하는 것이지만, 어쩌면 그 의식의 저변에 ‘다시는 한국에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염증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이준웅 교수는 이를 “정신적 망명상태”라고 표현했다.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으로는 어느 나라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사는 것.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조국을 떠난다는 마음가짐”이다. “이제 국가는 이동통신 서비스처럼 얼마든지 탈퇴하고 새로 가입할 수 있는 것이 돼버렸다. 전도유망하고 야심만만한 젊은이들은 그의 미래를 이 땅 아닌 다른 나라에서 꿈꾼다. 그의 선택을 문제 삼을 수는 없지만 미래의 영웅을 내치는 나라, 망명 선수를 응원하는 국민이 이렇게 많은 이 나라는 문제 있지 않은가”라고도 썼다.

 국가주의의 낡은 덫을 벗어던지고 세계인의 일원으로 사는 것과, 다시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은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하필이면 3월 1일 아침이다. 정녕 대한민국은 ‘정신적 망명객’들의 나라인가.

글=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부장대우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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