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 축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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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미국의 회사에서 사원들에게 나눠주는 복무규정은 거의 책 한 권이 될 만큼 자세하다. 그만큼 까다롭기도 하다.
복무규정 중에서 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대우문제다.
그것도『당신도 이렇게만 하면 중역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사원들에게 꿈을 안겨주도록 되어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물론 복무규정은 매우 까다롭다. 그러나 그것은 꿈과 희망보다도 목덜미를 죄어 매는 끄나풀처럼 사람들을 거북하게 만든다. 그나마 복무규정은 대개의 경우 인사비밀로 되어 공개되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미국사람과 우리와의 발상법이 틀린 탓도 있다. 한쪽은 모든 게 긍정적이고, 또 한 쪽은 부정적이고….
그러나 사실은 발상법의 탓만도 아니다.
가령 우리네 발전소 앞에는「위험」하다는 표지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다. 그리고 그 표지에는 으레 고압전류가 흐른다고 적혀 있다. 미국의 변전소는 다르다. 오히려 안전을 기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설명을 붙여 통행인을 안심시키고 있다.
한쪽은 위험을 강조하고 또 한쪽에서는 안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돌다리도 두들기고 지나가라는 속담 속에서 우리가 예부 터 살아온 탓만은 아니다. 도시 안전을 확인할 자신이 적은 탓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 대표적인 한 가지 예가 축대다.
서양에 가면 온 도시가 축대 위에 올라앉은 곳이 보이는 곳이 많다. 그것도 몇 백년씩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살면서도 아무도 위험을 느끼지 않는다. 그 만큼 안전도가 확인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축대는 위험하다는 생각을 먼저 갖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불과 몇 해 전에 만든 축대의 안전도도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 새벽에 서울시내에서 축대가 무너져 3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이런 참사가 다시는 없으리라는 것을 확인할 길도 없다. 그러니까 모든 축대는 우선은 위험하다고 보는 게 안전할 것이다.
제대로만 쌓은 축대라면 조금도 위험할 까닭은 없다. 그러나 어제 무너진 축대는 안전경사각인 60도를 훨씬 넘어 거의 직각에 가깝도록 세워진 것이었다. 더욱이 물기가 알맞게 빠져 나을 수 있도록 사이사이에 마련했어야 할 구멍이 전혀 없었다.
이런 위험한 축대가 이밖에도 전국에 2백92개가 넘는 다는 게 확인되고 있다. 물론 정확한 숫자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위험확인만으로 끝낸다. 안전확인이 뒤따르지 않는 것이다. 위험 축대 수는 몇 해 전이나 지금이나 별 변함이 없다. 전혀 당국이 손을 쓰지 않아 왔다는 얘기가 된다.
오늘도 당국은 위험축대를 조심하라는 계고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 축대는 안전확인을 한 것이니 안심해도 좋다는 얘기를 언제나 듣게 될지. 그것이 언제까지나 까마득한 얘기로 남아 있는 게 두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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