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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박근혜정부 1년을 보내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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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권석천
권석천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석천
논설위원

지난 1년은 ‘낭전(浪戰)’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물결 랑, 싸울 전. 얼마 전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거사 후 옥중에서 쓴 ‘동양평화론’에서 이 말을 만났다. 중국 사이트를 뒤져보면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이 “지세(地勢)를 따지지 않고 공격과 수비를 제대로 살피지 않고 벌이는 싸움”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째서 지난 1년이 낭전이냐고? 소모적인 싸움이 지루하게 거듭됐기 때문이다. 국정원 댓글 수사, NLL 대화록,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아들, 윤석열 검사 항명…. 처음부터 제대로 대응하면 됐을 일들이 지리멸렬하게 꼬여 갔다. 사안별로 승부가 가려지고 있지만 정작 승자는 없다. 그 결과 “한국엔 좌파도, 우파도 없고 자파(自派·자기편)만 있을 뿐”이란 서글픈 농담이 술자리를 맴돈다. 바탕이 되는 깊은 생각과 전략은 없고 승부욕과 전술만 무성한 탓이다.

 미국을 보자. 1960~70년대 연방대법원을 지배하던 사법진보주의의 흐름에 맞서 사법보수주의가 등장한 곳은 대학이었다. 80년대 초반 보수 성향의 로스쿨 교수·학생들이 ‘연방주의자 협회’를 조직해 보수주의자들의 대법원 입성을 지원했다. (『더 나인』) 우리 대학가에서 철학의 빈곤을 메우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한 교수에게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우리도 그러고 싶죠. 논문 쓰고 강의 하고 평가받기 바쁜데, 잘못하다간 퇴출될 수도 있는데 언제 그런 거대담론을 연구합니까?”

 시간 부족일까. 의욕 부족일까. 폴리페서(정치 교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치권 주변에 기웃댄다는 데 있는 게 아니다. 현실 정치를 개혁할 ‘참신한 청사진’이 없다는 데 있다.

 이렇게 생각의 기반이 부실하다 보니 보수와 진보 사이엔 말꼬리 잡기만 무한 반복된다. 자신이 한 말은 “문자 그대로 이해해 주고 실제로 한 말만 가지고 판단해 달라”고 요구하면서도, 상대방이 한 말에 대해선 “말의 어조며 전후맥락이며 숨은 의도까지 꼬치꼬치 따져서 최대한 과민하게 해석하고 반응”하는 것이다. (C.S.루이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중에서)

 자신의 장점보다 상대방의 단점을 부각시키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김연아 선수 은메달 판정에 분개하면서 눈앞의 불의에 대해선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판정하는 게 정치인들의 모습이다. 여기자 추행엔 경고, 항명 시비엔 정직 1개월, 재심사건 무죄 구형엔 정직 4개월을 내린 검찰의 징계 기준도 다르지 않다.

 이 모든 게 자신이 쥔 것을 놓지 않겠다는 욕심,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는 아집에서 나오는 것인지 모른다. 얼마 전 읽은 목영준 전 헌법재판관의 글은 우리에게 반성과 양보를 요구하고 있다. 그는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는 처방은 6대4의 마음”이라고 말한다.

 “내가 번 돈, 내가 가진 권력의 6할은 내 피땀, 내 노력으로 얻었지만, 나머지 4할은 우리 사회의 경제적 구조, 국가제도의 울타리 덕택에 얻은 것이다…내가 가진 부(富)도, 권력도, 이념도, 그 밖의 모든 혜택도 그 4할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자.”(『중재』 최근호)

 대통령도, 여야 의원들도, 검찰도, 기업도 6대4의 마음을 갖는다면 많은 게 달라지지 않을까. 지금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은 60%를 넘는다. 자신감을 갖고 나머지 40%에 가까운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면 낭전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이 올림픽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한쪽의 일방적 승리는 없다는 사실이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도 부대끼며 공존해야 하는 게 민주주의다. 올림픽과 같은 점은 반칙하지 않는 쪽이 이긴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린 싸우는 것 자체를 타박해 왔다. 오히려 진짜 문제는 제대로 된 싸움이 없었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 2년차에는 한국 정치, 한국 사회라는 아이스링크에서도 볼 만한 명승부들이 펼쳐졌으면 한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