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책과 세상] 한국 출판계 편집자를 키우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7면

출판 에디터(편집자)의 역할을 새삼 확인해준 글이 '세계의 문학' 봄호의 대담 '지식인이여, 편집자가 되라'다.

프랑스의 명문출판사 '쇠이유'의 에디터인 프랑수와 발(75)과의 그 멋진 대담에는 에디터가 '지식산업의 꽃'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자크 라캉.롤랑 바르트.자크 데리다의 저작물을 받아낸 산파였고, 1960년대 구조주의 사상의 숨은 연출자였던 그가 갖는 권위는 대단한 것이었다. "원고 이 대목 이렇게 고치자"고 지적하면 거물 움베르코 에코도 군말없이 응할 수 밖에 없었다니….

그는 에디터를 '숨은 신(神)'이라고 감히 자부하고 있던데, 일본 지식사회를 움직이는 숨은 신들의 힘도 막강하다. '편집의 신(神)'으로 불렸던 다나카 겐코(75.田中健五).

그는 46년을 문예춘추사 등에서 에디터로 활동한 뒤 99년 은퇴했다. 1년 매출 2조원의 고단샤(講談社)를 보자. 3월 현재 그곳에서 근무하는 직원은 1천1백48명인데, 지난해 그곳을 떠난 에디터는 4명에 불과했다. 사유는 정년퇴직 때문이었다.

문제는 한국이다. 출판산업의 한단계 도약을 위해서 국내에도 프랑수아 발.다나카 겐코를 키워내는 게 관건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국내 출판계는 구조로 볼 때 1인 기업 수준에 머물고 있다.

대표 혼자서 책의 기획, 원고 수거에서 교열까지를 챙기는 '나홀로 출판'이다. 에디터는 키워지지 않는다.

그런 사정 때문에 출판사 직원들의 이직률은 국내 제조업 중 가장 높지않나 싶다. 1~2년에 한두번꼴로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것도 출판계만의 별난 풍속이다.

에디터에 준하는 인물로는 70년대 문지 그룹의 김현과 김병익이 꼽히지만, 별도의 직업을 가졌던 그들은 엄격하게 말해 전문 에디터라고 보긴 어렵다.

근대 출판 여명기의 육당(六堂) 최남선과 소파(小波) 방정환 등도 일급 에디터로 꼽히지만, 그들은 20세기 초반의 '먼 그대'라서 롤(역할) 모델로 거리가 있다.

출판의 시스템을 뒷받침해주고, 일관성을 담보해줄 에디터가 없는 결과 국내 출판은 시대와 호흡하는 기동성이 떨어진다. 출판물의 질적 수준도 막고 있다.

한세대가 넘어가는 명문 출판사가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을유문화사.정음사.탐구당.일조각 등이야말로 왕년의 명문들이지만, 그들의 지금 역할은 미미하다.

최고령 현역으로 꼽히는 정진숙(91.을유문화사), 한만년(78.일조각)대표 밑에서 기억해둘만한, 자랑할 만한 전문 에디터가 단 한 두명이라도 배출됐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어 유감이다.

훈련된 인적자원을 보유하지 못한 한계, 취약한 전문 에디터층 때문에 요즘 책들은 옥석의 구분없이 상당수가 부실하다. 유행을 타듯 패션에 가까운 책들이 쏟아지기도 한다.

듣자니 전문 에디터 없이 운영돼온 을유문화사의 경우 철학자 탁석산씨가 주간으로 영입됐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3개월 만에 퇴사한다.

또 다른 메이저 출판사의 최장수 에디터(8년 근무) 편집자도 곧 그만둔다는 소식도 들린다. 출판은 뜨내기 인력들의 공간인가. 에디터없이 출판업의 도약없다는 명제를 되새겨봐야할 시점이다.

조우석 출판팀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