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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생을 '야동 중독자'로 만든 청소년정책연구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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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만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윤석만
사회부문 기자

초등학교 1, 4학년 아들을 둔 이모(36·여)씨는 최근 며칠 동안 자녀들을 괜한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밤늦게까지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딴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됐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성인물을 보느라 초등학생들이 잠이 부족하다’는 기사를 인터넷에서 보고 난 뒤부터였다. 이씨는 “숙제를 하느라 컴퓨터를 보고 있어도 설마 우리 애가 그런 건 아닌가 걱정이 들었다”고 말했다.

 초등학생들을 색안경 끼고 바라본 어른들은 이씨뿐이 아니었다. 지난 17일 인터넷과 18일자 일부 신문엔 마치 우리나라 초등생들이 ‘야동 중독’인 것처럼 묘사됐다. 국무총리 산하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원장 이재연)이 ‘초·중·고생의 수면시간을 연구한 결과 초등학생의 61.6%가 성인물 때문에 잠이 부족하다’는 통계 결과를 발표한 데 따른 것이다. 전국 4∼6학년 초등학생과 중·고교생 9521명을 대상으로 한 ‘한국 아동·청소년 인권 실태조사’였다.

 너무 충격적이었던 이 조사 결과는 발표 직후 인터넷과 SNS 등을 통해 일파만파로 퍼졌다. 그러나 이튿날 이 통계자료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청소년 주무부처인 여성가족부가 해당 기관에 조사 결과를 문의했고, 연구원은 통계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수치가 잘못된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정작 초등학생들이 수면 부족의 원인으로 성인물을 꼽은 경우는 2.1%에 불과했다. 주된 원인은 가정학습 61.6%, 드라마·영화·음악 감상 60.2%, 학원·과외 53.1% 등이었다.

 연구원은 발표 다음날 새벽에야 통계 수치를 정정하는 보도자료를 e메일을 통해 배포했다. 사실 확인 직후 대부분의 언론사는 즉각 관련 기사를 인터넷에서 삭제했지만 이미 신문지면으로 기사가 나간 뒤였다. 중국·일본 등 일부 외신도 같은 내용으로 보도했다. 물론 초등학생의 61.6%가 ‘야동 중독’이라는 기본 상식과 거리가 있는 보도를 하면서 한 연구기관의 보고서에만 의존해 보도한 언론의 책임도 크다. 다른 연구기관이나 전문가들의 분석을 통해 재차 확인했어야 옳다.

 그러나 정부의 국책연구기관이 충격적인 조사 결과를 내놓으면서도 제대로 확인작업을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정확한 조사와 분석으로 정책 수립의 기본을 마련하는 국책연구기관의 본령을 망각한 처사다. 연구원 측은 23일에야 “통계 처리 과정에서의 단순 실수였지만 오류를 잡지 못한 건 명백한 잘못”이라며 “혼란을 일으킨 것에 대해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국책연구기관의 잘못된 조사 결과는 엉뚱한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되새기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윤석만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