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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그 입지의 현장의 가다|「방콕」에 정착한 전 영화 감독 이경손씨(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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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기탁은 상해의 대중화영편공사에 촬영 감독 자리를 마련해 놓고 이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력거를 타고 일본인들이 자리잡고 있던 홍구가를 지난 두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이곳에서 보람있는 일을 해보자고 다짐했다.
상해의 「브로드웨이」남경로를 지나 영화 회사가 자리잡고 있던 영국 조계에 도착하니 정씨는 이씨를 공사 사장 주유국에게 소개했다. 소설가이자 호색가이기도 했던 주 사장은 자신의 소실집 한채를 이씨에게 내주며 댓바람에 『이원 염사』(어느 여배우의 「로맨스」)의 감독을 맡겼다. 남주인공은 정기탁, 여주인공은 당시 인기 절정의 중국 여배우 원영옥이었다.
이씨는 처음 맛보는 이국의 기후와 맞지 않는 음식 때문에 훌쭉이가 되면서도 열심히 작업을 했다. 영양 섭취를 제대로 하지 못해 낮이면 틈나는대로 시간을 내어 촬영소의 의상실에 마구 내던져진 옷더미에 파묻혀 낮잠을 자야 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씨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기껏 만들어 놓은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고 이씨를 초청했던 대중화영편공사는 문을 닫고 말았다.

<영화 사장 소실집까지 내줘>
이씨는 앞이 캄캄했다. 당시 상해에는 7백여명의 우리 망명 교포가 살고 있었다. 영국 조계나 「프랑스」 조계에 모여 살던 이들은 대부분 일정한 직업 없이 이곳에서 교육받은 2세들이 벌어 오는 돈으로 곤궁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2세들의 직업은 대개 전차표 검사원이었다. 상해의 전차는 거리와 노선에 따라 요금이 제각기 달랐는데 차장들의 「삥땅」이 워낙 심해 전차 회사는 삥땅 감시원을 대거 고용했었다. 우리 망명가의 2세들은 중국인의 눈치를 보는데 일본 형사들보다 빨랐기 때문에 이 직업에는 안성마춤이었다.
그러나 상해의 지리와 언어에 낮선 이씨는 당장 이짓 마저도 못할 형편이었다. 게다가 상해는 망명가의 특정인 체포 선풍과 이를 위한 밀정들이 득실거려 한국인들은 항상 신체상의 불안을 느끼면서 살아야 했다. 비록 일본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영조계나 불조계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일본 관헌으로부터 뇌물을 받아먹은 「프랑스」경찰들이 1년에 두세번씩 한인 망명객을 잡아다가 홍구의 일본 헌병대에 넘겨 일본 장기나 대련·신의주의 감옥에 보내 5년내지 10년씩 고생을 하게 했기 때문에 이씨는 더욱 불안했다.
이뿐 아니라 한국인 중에도 일본 관헌의 압잡이들이 있어 한인 망명객들은 대부분 서로의 처소를 남에게 알리지 않은 채 낮이면 중국식 남색 장포를 걸치고 「프랑스」조계안에 있던 「프랑스」공원을 배회하기 일쑤였다.
이씨 역시 이 같은 생활을 따랐다. 그러던 어느날, 이씨는 공원에서 우연히 고국에서 같이 일하던 전창근과 촬영기사 한창섭을 만났다. 이씨로서는 뜻밖의 일이었다. 사연인즉 전·한씨 모두 이씨가 상해로 떠났다는 소문을 듣고 뒤따라 왔다는 것이었다.

<감독의 이름마저 못 밝혀>
연애 솜씨가 비상했던 전창근은 상해 도착 직후 어느새 백계 「러시아」처녀를 아내로 맞아들여 처가에 기식하고 있었다. 이씨의 딱한 처지를 안 전창근은 두 사람을 무턱대고 자기 처가로 데리고 갔다. 상업을 하던 전씨의 장인은 조금도 귀찮은 내색을 하지 않고 2명의 조선 청년을 식객으로 맞아들였다. 세 사람의 젊은이가 그냥 밥만 썩히자니 장인·장모에게 미안했던지 전창근은 이튿날부터 동분서주하기 시작했다.
전씨는 막무가내로 이씨에게 원작과 각색을 써내라고 졸랐다. 이씨는 부랴부랴 이야기를 얽어냈다. 첫 장면은 양자강 흙탕물에 떠내려오는 군복의 시체들, 다음은 농촌의 흉년, 세금 못 내어 매맞는 백성, 어린 누이동생을 강탈해가는 지방 관리, 그리고 거기에 반항하다 체포되는 주인공 등등…. 대충 이런 줄거리였다. 전창근은 무릎을 치며 이 작품을 가지고 나가 남양영편공사를 「스폰서」로 물고 들어왔다. 이씨는 전창근의 탁월한 외교술에 얼떨떨하기만 했다.
일행은 중국에서 항주 다음으로 경치가 좋다는 무석에서 이 영화의 촬영을 끝냈다. 제목은 『양자강』―. 그러나 이씨도 전창근도 모두 숨어사는 형편에 「감독에 이경손, 주연에 전창근, 촬영에 한창섭」이란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 망국의 한이 가슴까지 저려왔다. 영화 『양자강』의 흥행은 대성공이었다. 전창근은 외교 수완이 어찌나 비범했던지 아무 정부에도 세금 한푼 안내고 수지를 맞췄다.
이렇게 되자 영화사 사장은 이 「필름」을 한국에 보내어 흥행 이익금을 반씩 나누자고 제안했다. 이씨나 전씨는 고국에 이미 이름이 알려져 있어 돌아가 일경에게 「나 왔읍니다」할 처지가 못되었다.
결국 한창섭과 전씨의 고향 친구 두 사람을 보냈는데 이 영화는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익금을 가지고 돌아오겠다던 한창섭과 그 일행은 영영 상해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우리 나라 최초로 망국의 예술가가 이역에서 만든 영화는 제작자의 이름도 밝히지 못하고 돈도 떼 먹히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중국어 항일 소설 『대만』발표>
전창근의 처가에 면목도 잃고 실의에 빠진 이씨는 그 길로 봇짐을 싸 짊어지고 나와 다시 상해 거리를 방랑하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이란 4억 인구가 4백∼5백명의 영국 군인들에게 눌려지내던 처지였다. 모두 상해에 모여 살던 영국인들은 은행·보험·해운업 등을 모조리 장악, 중국 대륙으로부터 고혈을 빨아 가고 있었고 몇몇 중국 부자들만이 영조계에 붙어살면서 호의호식했다.
이런 상황임에도 문인들을 비롯, 일부 중국의 지식인들은 상해에 숨어살면서 「레지스탕스」운동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망명객들은 주로 이들과 교유했다.
이씨 역시 당시 상해에서 활약하던 중국 문인 전한이 경영하던 잡지사 『남국사』를 찾았다. 이곳을 드나들면서 그는 현지 문인들과 친교도 넓히고 중국어 항일 소설 『대만』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이씨는 임시 망명 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을 거리에서 만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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