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박수 치지 않을 때 떠나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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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기자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이상화도 김연아도 있지만, 이번 소치 겨울올림픽의 가장 인상적인 선수로는 이규혁을 꼽고 싶다. 이를 악물고 달리는 그의 마지막 1000m 스케이팅은 예전 경기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는데도 자꾸 보게 된다. 무엇보다 경기 후 이어진 인터뷰가 감동이었다. 세계 최고의 기량을 갖고도 여섯 번이나 출전한 올림픽에서 메달을 하나도 따지 못한 그는 말했다. “올림픽은 핑계였을 뿐 스케이트가 계속 타고 싶었던 것 같다”고. “메달을 떠나 스케이트를 통해 삶을 배웠고, 그래서 행복했다”고도 했다.

 치열한 경쟁이 스포츠에만 있을까. 최근 만화 『피아노의 숲』을 읽다 울컥하고 말았다.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진 이 만화는 유명 피아니스트의 아들인 슈우헤이와 빈민가 숲에서 자라난 카이라는 두 소년의 성장담을 그린다.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있는 힘껏 노력했지만 타고난 천재인 카이의 피아노를 넘어설 수 없음에 절망해 온 슈우헤이. 둘이 처음으로 맞붙은 쇼팽 콩쿠르에서 홀로 탈락을 경험하고 나서야 슈우헤이는 깨닫는다. 카이를 이겨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즐길 수 없었을 뿐, 사실은 피아노를 정말 좋아했다는 것을. 경쟁과 승부를 떠나 “나에겐 평생을 걸고 나의 음악을 추구할 수 있는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피아노의 숲’의 한 장면. [사진 이모션픽쳐스]

 재능을 가진 이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누구나 이루고 싶은 무언가가, 넘어서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이것이 과연 원하는 성취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박수 칠 때 떠나라’는데, 당최 박수를 받을 일이 없으니 언제 떠나야 할지도 알 길이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규혁 선수가, 슈우헤이가 이야기한다. 떠나야 할 때를 지나 떠나도 괜찮아. 아무도 박수를 쳐주지 않을 때 떠나도 괜찮아. 그 과정을 지나는 동안 “즐거웠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무모한 도전처럼 보였을지 모를 그 시간들 역시 내겐 큰 의미가 있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으니까.

 이번 올림픽 최고의 명언 “올림픽은 핑계였을 뿐”은 2005년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배우 황정민이 했던 수상소감 “스태프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올렸을 뿐”처럼 두고두고 패러디될 가능성이 높다. “수능은 핑계였을 뿐 그저 공부가 하고 싶었다”거나 “오디션은 핑계였을 뿐 노래가 하고 싶었다” 등으로 활용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도 묻지 않겠지만) 이런 소감 하나 준비해 놓을까 한다. “마감은 핑계일 뿐 그저 기사가 쓰고 싶었다”라는. 음, 근데 왜 이렇게 거짓말처럼 들리지?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