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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8)<제42화>주미대사시절(11)|양유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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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 대통령의 방미>
한국정부가 3개월 기한부의 휴전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응했던 「제네바」정치회의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미대통령은 다시 이 대통령이 어떤 일을 벌이지 않을까 염려해서 54년7월 이대통령에게 방미해달라는 초청장을 보냈다. 「아이젠하워」대통령은 이 박사를 만나 한국의 장래와 기타 문제를 토의하고 싶다고 했다.
이 박사는 「제네바」회의 후 무력통일밖에 방법이 없다면서 휴전협정파기를 주장했다. 반공포로석방도 단행했던 이박사인지라 미국정부로서는 이박사의 무력통일발언이 한낱 엄포만은 아니라고 믿어 겁을 냈던 것이다.
이 박사도 미국이 강청했던 정치회의가 실패로 끝난 이상 그 다음 대책이 무엇인가고 「아이젠하워」대통령에게 직접 듣고 싶어했고, 시급한 국군현대화·경제부흥원조문제를 논의해 보고싶던 터였다. 그래서 초청을 수락했다.
이 박사는 부인 「프란체스카」여사·최순주 국회부의장·손원일 국방부장관·갈홍기 공보처장·정일권 육참총장 등 군수뇌를 대동하고 7월26일 미국에 도착했다.
공항엔 그 전 해 한국을 방문했던 「닉슨」부통령이 영접 나왔다.
「아이젠하워」대통령은 휴전협상이 한창 고비에 걸쳤던 53년4월 이 대통령의 방미를 초청한바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나는 그전부터 「아이젠하워」대통령에게 이 박사가 얼마나 훌륭한 지도자인가를 여러 차례 설명했다. 「아이젠하워」도 『한국의 건국과정과 「6·25전쟁」극복과정에서 보여준 이박사의 지도역량을 높이 평가한다』면서 그를 존경하고 있다고 했다.
당시 이 박사는 미국 「매스컴」에 거의 매일 오르내렸으며 특히 휴전협상기간을 통해 얕잡아 불 수 없는 지도자로 부각돼 있었다. 미국 조야에선 어느 정도 「고집쟁이 인물」이라고 말하면서도 위대한 정치지도자로 인정했다.
그래서인지 이 박사에 대한 「아이젠하워」대통령의 대접도 융숭했다. 방미기간 중 서먹서먹한 대면장면이 있긴 했지만…. 외국원수로는 처음으로 「뉴요크」 「브로드웨이」에서 영웅행진(히어로·마치)의 환영까지 받았다.
이 박사는 군악대가 선두하는 가운데 무개차를 타고 5색종이의 꽃가루세례를 받으며 「브로드웨이」거리를 행진했다.
나로서는 주미대사 9년을 통해 가장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이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해 15만명의 「뉴요크」 시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가두에 나왔다. 이날은 그야말로 「코리아·데이」였다.
하루는 「덜레스」국무장관이 이 박사를 위해 「워싱턴」의 「에디슨·하우스」에서 만찬을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
「덜레스」장관이 환영사를 하면서 『이 대통령께서 오시게되면 어떻게 해서 기쁘게 해드릴까 하고 여러모로 생각해 보았으나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못했었는데 얼마 전 이대통령께서 보내주신 한 쌍의 곰을 백악관 뜰에 끌어내어 보실 수 있도록 하리라고 마음먹고 동물원장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러나 동물원장 말이 그동안 곰이 크게 자라서 옮기기가 어렵다는 것이어서 중지했습니다.
그런데 이대통령께서는 노경에 들어서도 이 곰과 같이 더욱 원기 왕성하시니 반가운 일입니다』고 했다.
「덜레스」가 말하는 곰은 국군이 강원도산골에서 사로잡은 암수 한 쌍으로 이름을 「곰이」 「곰아」라고 했다. 이 박사는 이 곰을 미특별기편에 「아이젠하워」대통령 앞으로 선물로 보내었다.
이 박사는 이 말을 듣더니 껄껄 웃고 나서는 『그건 매우 유감이요』하고 서두를 꺼냈다. 그러고는 『여러분! 나의 처지가 지금 동물원 울안에 힘없이 갇혀있는 저 곰과 같이 행동의 자유가 묶인 상태입니다』고 정색을 하고 받아넘겼다.
좌중은 이 박사의 「위트」에 떠나갈 듯한 박수와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말뜻을 알아차린 「덜레스」의 표정은 심각해 보였다.
이 박사의 말인즉 타의의 휴전을 받아들인 한국군이 확보한 탄환이라곤 며칠도 견디기 어려운 소량이고, 게다가 미국이 한국의 북진통일을 극력 반대하고 있는데 대한 불만을 나타낸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아이젠하워」대통령과의 회담에서도 그랬지만, 미국 내 강연회에서 중공의 후환을 막기 위해 중공과 예방전쟁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미상·하 양원합동회의에서 이 박사는 강경한 어조로 중공과의 예방전쟁론을 폈다.
『중국본토의 공산정권은 극히 취약한 발을 가진 괴물입니다. 그러므로 미국해군이 중국해안을 봉쇄한다면 중공은 일대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중공을 놓아두고는 「아시아」의 평화는 어렵습니다….』
「뉴요크」시장이 베푼 오찬회에서 이 박사는 중국본토반격작전론을 말했다.
『「아이젠하워」대통령과 나와의 견해차이는 제3차 세계대전을 지금 치르느냐 앞으로 미루느냐는 데 있습니다. 중공정권에 대한 반격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미 해·공군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지상군은 한국과 자유중국 육군들이 담당할 것입니다.』
이처럼 이 박사는 도처에서 대중공예방전쟁론·휴전협정파기론을 주장하고 미국의 대공유화정책을 규탄하고 다녔다.
하루는 이박사의 방에 밤늦도록 불이 켜져 있어 들어가 보니 이박사가 전등불 밑에 앉아 다음날 있을 강연회의 연설원고를 손수 타자하고 있었다. 새벽3시였다.
그만큼 이 박사는 노구를 무릅쓰고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대통령이나 국무성에서는 대미비판을 빼놓지 않는 이 박사의 강연 행각을 몹시 못마땅하게 받아들였다. <계속><제자 양유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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