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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선|이시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내 다시 한번 돌아가 싸워야겠다
얼어붙은 눈알을 네 개나 달고
말 많고 토라지고 겁이 없어서
틀렸다고 생각하면 단연 일어나 주먹으로
대가리로 끝내는 마을
모든 책 버리고 마음 버리고
몸 하나로 그 곳에 내려야겠다
해가 지면 수렁 속 그림자들 돌다리에
삽날을 가는 곳
구장네 저녁 밭에서 돌아온 아낙네들 모여 깔깔거리며
속곳에 가득 담긴 고추를 털어 내는 곳
맨 주먹으로 개들을 때려잡고
경운기패들과 섯다판을 벌이다가
이마에 피를 보고야 헤어지는 형님들
간봄에 진 겉보리 두 가마 갚을 수 없을 때는
달밤에 낫을 들고 넘보는 담
누군가 빠져 죽어 등에 업혀 들어와야
땅을 치고 안심하고 잠드는 마을
호박들은 등성이를 타고 오르다가
순찰 나선 도깨비 보고
와락 물러서서 잎사귀 늘어뜨리는 밤
밤 봇짐 싸 들고 다급하게 동구를 빠져나가는 처녀애 둘
시퍼런 기적이 울고 머리를 돌려 누워도
삿갓 쓰고 산을 내려온
죽은 복실이 아버지가
몽둥이 들고 주막 밖을 얼씬거리는 마을
밤을 지샌 쌈닭들은 족제비가 되어
목도 없이 뒤우뚱거리며 골목길로 달린다
내 다시 한번 내려가
그 귀신들과 싸우다 죽어야겠다
(신춘 「중앙문예」 69년 시조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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