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은 디지털시대에도 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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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은 담배 연기로 가득 차 있다. 재떨이 속의 수북한 담배꽁초가 지난 밤의 격전을 말해 준다. 책상 위에는 원고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한 회 방송분인데, 1천자 원고지로 30장이 넘는 분량이다. 워낙 속필(速筆)인지라 '숙달된 조교'가 아니고서는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다. 지난 17일 오후 서울 동부이촌동 자택. KBS 드라마 '아내'의 작가 정하연(58)씨는 첨단 하이테크 시대를 거꾸로 살고 있다.

"난 컴퓨터로 글을 쓰는 것에 회의적입니다. 컴퓨터는 차갑고 가식적입니다.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글이 탄생하지 않아요. 특히 멜로와 컴퓨터는 상극이지요. 난 원고지 위에서 등장 인물들과 밤새도록 대화를 나눕니다. 같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하루 다섯갑이 넘는 담배를 피우는 건 그 무대 배경을 만드는 거지요."

지난해 사극 '명성황후'에 이어 '아내'에서도 그는 유감없이 저력을 발휘하고 있다. 철옹성처럼 여겨졌던 SBS '야인시대'를 끌어내리고 월.화요일 밤 시청률 투 톱 체제를 구축했다. 1982년 같은 제목과 구도로 방영됐던 드라마를 20년의 세월을 넘어 다시 히트시킨 것이어서 더욱 의미 있다.

"흥행코드를 따라간 것이라고요? 천만에요. 처음엔 모두가 회의적이었어요. 빠르고 자기 중심적인 세상에 누가 이런 헌신적인 사랑을 좋아할까 했어요. 그런데 어느날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똑똑한 사람들만 판치는 세상, 한번 심각한 사랑을 만들어 보자고요."

'아내'는 느린 템포의 드라마다. 2003년판 '아내'에서 조연들이 많아지고 주인공 직업도 바뀌었지만 역시 화려한 볼거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자연히 주요 배역들의 연기력이 필수적이다.

과거 한진희(상진 역).김자옥(나영 역).유지인(현자 역) 같은 연기자들이 필요했다. 다행히 김희애.유동근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현자였다.

이때 정씨 부인이 엄정화가 어떻겠느냐고 아이디어를 냈다. 처음엔 "지나치게 도시적인 배우는 안된다"고 일축했지만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보고 생각을 바꿨다. "세 사람 다 지독한 배우들이에요. 유씨는 수시로 제 집에 와 토론을 청할 정도예요."

20년 전 '아내'는 불륜 드라마의 대표격이었다. 삼각관계도 제대로 그릴 수 없었던 군사정권 시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드라마가 순수 드라마로 평가되는 것에 대해 그는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했다.

"82년에는 원부인(나영)에게 정착하는 게 결론이었어요. 그런데 시청자들이 점점 현자 쪽으로 감정이 쏠렸어요. 여론조사까지 했는데 8대2 정도로 현자편이었죠. 결국 마지막 회에서 상진은 현자에게 갔어요. 그런데 이번엔 조금 양상이 틀려요. 오히려 나영편이 많습니다. 순정이 메말라 버린 세상이라 그런지 부인의 오랜 기다림이 어필하는 것 같아요. "

이제 후반부 20회는 82년 작품에 없었던 내용으로 꾸며진다. 정씨는 이 부분에 '아내'의 정수를 담겠다고 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느 정도 결론이 나와 있지만 연출자에게도, 연기자에게도 미리 얘기하지 않았다. 승자와 패자의 감정이 벌써부터 연기에 깃들까 해서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건 전례에 비춰 봤을 때 정씨의 결론 역시 '움직이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자, 상진은 누구에게 갈 것인가.

이상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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