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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상 멋대로 유통 … 총독부 시절에도 한지 등급 관리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수제한지’,‘예쁜 한지’ 상표가 붙은 태국산 기계지.

한지 유통 과정은 중병에 걸려 있다. 한지는 소비자가 물건을 사야 생산되고 품질도 향상되는데 그런 선순환 구조가 붕괴돼 있다. 취재 중 만난 한지 장인들은 “중국 종이가 유통 과정에서 한지로 둔갑해 팔린다”고 의심했다. 한지 생산을 위축시키고 가짜가 판을 치는 사기가 횡행한다는 것이다. 취재해 보니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12일 인사동의 5개 지엽사에서 한지를 구입했다. 모두 “얼마짜리를 찾느냐”고 묻는다. 중국산이 아닌 가장 싼 한지를 달라고 하자 내놓은 것은 1000원, 3000원, 4000원, 5000원, 8000원짜리였다. 1000원짜리를 준 J사 점원에게 “중국산 같다”고 하자 “우리 가게엔 중국산이 없다”고 한다. 1000원짜리 국산이라는 건데 직전 B한지에선 “1000원짜리 국산은 없다”고 했었다. 석연찮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B한지에서의 경험은 더 언급할 필요가 있다. 거기선 진짜 한지라며 3000원짜리를 줬다. 표백해서 흰색이기 때문에 싸단다. 표백 안 한 것을 달라고 하자 “전통 잿물로 만든 안동한지”라며 7000원짜리를 꺼냈다. 누런 옅은 황토색. 장인들에게 듣기론 진짜 한지는 1만원이 넘는데 어떻게 이렇게 쌀까. 진짜를 달라고 하자 그제야 “비싼데… 김재식 장인이 만든 황촉규지”라며 1만8000원짜리를 꺼낸다.

 그 가운데 ‘7000원짜리 한지’를 사서 한국전통문화학교 전통미술공예학과 김호석 교수에게 보였다. 그는 “안동에서 유일하게 한지를 제작하는 회사는 안동한지”라며 전화를 직접 걸었다. “전통 잿물로 만든 한지가 있느냐”고 하자 회사 대표는 “사경지라는 얇은 종이가 있는데 장당 3만원이다. 7000원짜리는 양잿물로 만든 종이일 것”이라고 했다. 전통한지에선 양잿물을 안 쓴다. 7000원짜리는 가짜 한지다.

 이런 사기 행위를 막기 위해 2013년 4월 한지품질표시제가 도입됐다. 그러나 현장에서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한지 가격은 멋대로였고 꾸러미엔 ‘안동’ ‘전주’ 같은 표시가 돼 있었지만 믿기 어려웠다. 표지를 갈면 그만 아닌가. 실제로 S표구사에서 우연히 현장을 봤다. 표구사에 들른 한지 업자는 한지 위에 자기 공방의 도장이 찍힌 마크가 있는 것을 보고 “이거 우리 도장 아닌데… 우리 건 한자거든. 누가 한글 도장을 팠구먼”이라고 했다. 주인에게 따졌지만 어물어물 넘어갔다.

 한지산업지원센터 임현아 연구개발실장은 “품질표시제를 하면 유통업자들이 생산자를 밝혀야 하는데 그러면 소비자가 생산자와 직거래한다고 꺼린다”며 “그러니 생산자는 유통업체를 따를 뿐”이라고 말한다. 유통업자가 소비자·생산자를 우롱하는 꼴이다. 이런 상황은 일제 강점기 때보다 못하다. 당시 전라북도는 중개수수료를 2%로 하고 상인·중개인에게 각각 1%씩 내라 했지만 상인이 거부해 모두 생산자 부담이 됐다. 생산자가 봉이 되기는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나마 1934년엔 총독부가 한지에 1, 2, 3, 4 등급을 매겨 품질을 감시하고 규격도 통일시켰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없다.

 기계 한지 상황도 못지않다. 시중에서 구입한 ‘수제한지’ 상표의 종이는 ‘전통 방식에 준해 한 장 한 장 정성으로 만들어진 한지’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실제 원산지는 태국이다. ‘수제’라는 구실은 옆의 보풀 때문인데 종이의 본질과는 관계없는 것이다. ‘예쁜 한지’는 한지의 기원까지 버젓이 써놨다. 한지 장인들은 이 종이들은 수제 한지가 아닌 수입 기계지라고 한다. 그런 ‘가짜 한지’들은 전통 한지를 고사로 몰아가는 공범이다.

안성규 기자·임보미 아산정책연구원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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