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뒤돌아보니 미래 보여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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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여대 ‘미리 쓰는 자서전’ 공모전 수상자들이 자서전 다이어리를 들고 있다. 이 대학은 올해 신입생부터 의무적으로 자서전을 쓰게 할 예정이다. [김경빈 기자]

‘햇빛을 받으면 반짝이던 갈색 머리카락을 잃었다. 1년이란 긴 시간과 교환학생 기회도 사라졌다. 하지만 내가 찾아 헤매던 행복의 열쇠는 바로 여기, 현재에 있었다. 마침내 슬픔도 잠들었다’.

 방송사 인턴을 마치고 캐나다 토론토대에 교환학생으로 나갈 준비를 하던 지난해 6월. 숙명여대 하보라(21·영어영문 2)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을 겪었다. 혈액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항암치료 8번, 혈관성형 2번, 방사선 치료 17번을 견뎌낸 하씨는 스무 살 인생을 되돌아보는 A4용지 40장 분량의 글을 썼다.

 그는 숙명여대가 지난해 말 개최한 ‘미리 쓰는 자서전(自敍傳)’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하씨는 “모든 게 잘되고 있던 때 꿈이 한꺼번에 날아가 버렸는데 자서전을 쓰다보니 빨리 성공하려고만 했던 것이 얼마나 허망했는지, 남을 돕고 사는 삶이 왜 중요한지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만년(晩年)에나 쓸 법한 자서전을 학생들이 미리 써보도록 하는 수업을 전교생 대상으로 실시하는 대학이 나왔다. 숙명여대는 10일 올해 신입생부터 1학년 1, 2학기 중 교양필수과목 ‘역량개발’ 수업을 들으면서 의무적으로 자서전을 써보게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밝혔다. 황선혜 총장은 “학생들이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기회를 가지면서 인생의 방향을 정하게 하려고 자서전 수업을 본격 시작한다”며 “올해 신입생부터 전교생에게 적용키로 했다”고 설명했다.

 학교 측은 지난해 자서전 작성 수업을 5개 강좌 수강생에게 시범 실시한 뒤 공모전을 열었다. 57명이 참가한 가운데 하씨 등 18명이 수상했다. 자서전 내용을 담은 책 2500권을 제작해 올해 자서전 수업에 참고자료로 활용할 예정이다. 프로그램 기획에 참여한 윤창국(교육학) 교수는 “모든 리더십은 성찰에서 시작되므로 20대에 과거를 반추하는 게 의미가 있다”며 “ 학생들이 논리력과 자기표현력을 기를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자서전을 써본 학생들은 “앞만 보고 달리다 뒤를 돌아보니 나 자신을 더욱 아끼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미운오리 날다’라는 글로 금상을 받은 박솔희(24·정보방송 4)씨는 “95점을 맞아도 100점 맞은 아이와 비교하며 루저 취급을 하는 게 우리 사회여서 학창시절 내내 나 자신을 미운 오리라고 여겼다”며 “하지만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영원히 행복할 수 없을 테니 예쁜 백조 대신 행복한 미운 오리가 되기로 했다”고 말했다.

 자서전 쓰기는 힐링의 기회도 됐다. 은상을 받은 이은진(20·사회심리 2)씨는 “행복했던 순간과 불행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더니 미래의 밑그림이 그려지더라”고 했다. 금상 수상자 이현아(23·언론정보 4)씨도 “좋은 대학, 해외 연수, 대기업 취직이 의무처럼 돼버린 세대인데 바쁜 일상을 멈추고 돌아보니 내가 참 열심히 살았다는 걸 알게 됐다”며 “그런 나를 더 사랑하게 됐다”고 말했다. 공모전 심사를 맡았던 권성우(국문학) 교수는 “자기중심적이기 쉬운 요즘 대학생들이 자서전을 쓰면서 인생에 대한 균형감을 기를 수 있었으면 한다”고 했다.

글=신진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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