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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의 힐링투어] 강진땅 어떤 힘이 세상 끝에 선 다산을 살게 했을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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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호 28면

다산이 강진에서 꼬박 4년을 머물렀던 주막집. 천장 낮고 협소한 주막집 행랑채를 다산은 ‘사의재’라 불렀다. 사의재에는 생각·용모·언어·동작 네 가지를 반듯이 해야 한다는 뜻이 어려 있다. 손민호 기자

여행은 사람을 만나고 오는 일이다.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걸음도 좋지만 이왕이면 사람을 만나고 오는 걸음이어야 한다. 미당의 노래처럼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이 아니라 연꽃 만나고 오는 바람이어야 한다. 여행은, 나보다 먼저 살다 간 사람의 흔적을 들여다보거나 나와 다른 공간에 사는 사람의 모습을 엿보는 행동이다.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이 엇갈린 사람과 인연을 맺는 일이다.
하여 어떤 여행은 오롯이 한 사람을 향한 여정이 되기도 한다. 나에게도 그런 여행이 있다. 이 계절이 되면, 그러니까 남도 붉은 흙에 빨간 동백꽃 소복이 쌓이는 계절이 돌아오면 기어코 찾아가야 하는 그곳이 있다.

⑥ 전남 강진 다산 유배처<上>

전남 강진.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유배처다. 다산은 이 후미진 남도 끝자락에서 정확히 17년9개월을 살았다. 다산은 마흔 살이 되던 1801년 11월(음력)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강진에서 18년 세월을 견딘 뒤, 쉰여덟 살이 되던 1818년 9월 경기도 남양주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고향에서 18년을 더 살고 죽었지만, 다산의 주요 저작 대부분이 유배처 강진에서 생산됐다.

위인의 생애를 되밟는 여행은, 당신을 추모하는 여정이 되기 일쑤다. 그러나 그건, 수학여행 떠난 학생들의 여정이다. 나에게 강진 여행은, 궁지에 몰린 한 사람의 일상을 지켜보는 일에 가깝다.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서 내팽개쳐진 한 사람의 절박한 세월이 강진에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상가이기 전에 남자였고, 가장이었고, 아비였고, 아우였던 인간 정약용의 눈물과 허기가 거기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유배길에 남은 다산의 흔적을 2회에 걸쳐 싣는다.

강진 읍내 외곽의 갯벌. 강진 읍내에서 6년여를 산 다산은 갯벌이 끝나는 귤동마을 산기슭의 다산초당에서 10년여를 산다. 이 갯벌을 따라 강진 특산품 목리 장어가 올라온다.

남도 붉은 흙에 동백 쌓일 때면 찾는 곳
신유박해는 혹독했다. 정약종·이승훈·이가환·황사영·권철신, 청나라 신부 주문모 등 100여 명이 처형됐고, 정약전·정약용 등 400여 명이 전국으로 유배됐다. 약종은 다산의 둘째 형이고, 이승훈은 다산의 매형이며,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숙부이고, 황사영은 다산의 큰형 약현의 사위이니 조카사위다. 다산의 집안은 신유박해로 풍비박산이 났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다산도 하루아침에 사교(邪敎)를 숭배하는 역적으로 몰렸다.

다산은 사교, 즉 천주교에서도 역적 신세였다. 기록에 따르면 다산은 매형 이승훈과 조카사위 황사영의 죄목을 일러바쳤다. 다산은 형틀에 묶여 천주교인 색출법을 알려주었고, 포도청은 다산이 알려준 방법으로 천주교인을 검거했다. 다산의 행동은 배교(背敎)에 가까웠다. 그래서일까. 다산은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다. 1801년 11월 5일 다산은 형 약전과 함께 귀양길에 올랐다.

11월 21일 형제는 전라도 나주 율정점이라는 마을에 도착한다. 형의 유배지는 흑산도이고 동생의 유배지는 강진이어서, 이튿날 날이 밝으면 형제는 각자 다른 길을 가야 했다. 형과 마지막 밤을 보낸 다산은 꾹꾹 울음 삼키며 시를 썼다.

‘초가 주막 새벽 등불 푸르스름하게 꺼지려 하는데 / 일어나 샛별 보니 이별할 일 참담해라 / 두 눈만 말똥말똥 둘이 다 할 말 잃어 / 애써 목청 다듬으나 오열이 터지네 / 흑산도 아득한 곳 바다와 하늘뿐인데 / 그대는 어찌하여 그 속으로 가시나요’ -‘율정별(栗亭別)’ 부분

율정점은 나주시 대호동에 있다. 옛 주막의 흔적은 없지만, 길은 아직도 세 갈래로 갈라진다. 삼거리 모퉁이에 놓인 비석에 200여 년 전 형제의 이별이 간략하게 적혀 있다. 그 밤 이후 형제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고통스러운 삶 속에도 늘 두 아들 걱정
나주에서 이틀을 더 걸어 다산은 유배처 강진에 다다른다. 다산이 나타나자 강진 사람들은 문을 부수고 담을 무너뜨리며 달아났다(破門壞墻). 다산은 이제 ‘유언비어 날포로 민심을 흉흉케 한 / 천주학 수괴’(곽재구 ‘귤동리 일박’ 부분)일 따름이었다.

다산은 강진읍성 동문 밖 주막집에 겨우 거처를 얻었다. 강진에서의 첫 거처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다. 주막집 행랑채에서 다산은 꼬박 4년을 살았다. 낮에는 아이들에게 『소학(小學)』 등을 가르치고, 밤에는 무뢰배의 주정을 들으며 하루를 버텼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목민심서』를 비롯해 50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다. 그중에서 『아학편훈의(兒學編訓義)』가 주막에서 쓴 것이다. 이 책은 말하자면 아동용 교재다. 다산은 스스로 교재를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렇게 해서 다산은 밥을 벌었다.

다산은 강진에서 부지런히 편지를 썼다. 특히 두 아들에게는 수시로 편지를 보냈다. 닭 치는 법, 과일 재배법, 술 마시는 법까지 다산은 편지로 자식을 가르쳤다. 그러나 아비가 누누이 강조한 건 학문이었다. 아비도 아비의 죄 때문에 아들이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아비는 아들에게 학문에 힘쓰라고 말하고 또 말했다.

‘이제 너희는 망한 집안의 자손이다. 폐족으로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 한 가지밖에 없다. 중간에 재난을 만난 너희 같은 젊은이만이 진정한 독서를 하기에 가장 좋은 것이다.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고 세상에서 얕잡아보는 것도 서글픈 일일진대 너희는 스스로 천하게 여기고 얕잡아 보고 있으니 자신을 비참하게 하는 일이다’-『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부분

아들에게 “망한 집안의 자손”이라고 말할 때 아비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 편지를 쓴 날짜가 1802년 12월 22일이다. 다산이 주막집에서 두 번째 겨울을 보내던 때였다.

주막집 뒷마당에 서 있는 주모와 주모의 딸 동상. 다산은 주모의 딸 사이에서 딸을 본 것으로 전해진다.

주막 뒷마당 주모와 딸 동상의 비밀
다산은 이 주막에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란 뜻의 ‘사의재(四宜齋)’라는 당호를 건다. 흥청거리는 주막에서도 바른 마음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가 어려 있다. 늙은 팽나무 한 그루 외로이 서 있던 주막 터는 현재 말끔히 복원돼 있다. 강진경찰서에서 동쪽으로 300m쯤 떨어져 있는데, 차와 막걸리 따위를 판다. 최근에는 아욱국도 팔기 시작했다. 다산이 강진에서 자주 아욱국을 먹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주막 뒷마당에는 동상이 서 있다. 다산의 동상이 아니다. 주모와 주모의 딸 동상이다. 동상 아래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동문 밖 주막집 주모와 딸은 정약용 선생을 처음 맞이해준 강진 사람들이다. … 모녀의 따뜻한 보살핌이 없었다면 다산과 실학사상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에 강진군은 동상을 제작하여 모녀의 아름다운 정신을 길이 기리려 한다.’

이 모녀 동상에는 서글픈 사연이 전해온다.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운데,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여서 여기다 적는다. 다산은 강진에서 딸을 본다. 1813년 8월이니까 다산이 쉰한 살 때다. 딸 이름이 ‘홍임(紅任)’이다. 홍임의 어미가 주모의 딸이다. 늘그막에 얻은 딸이 애틋했는지, 다산은 매화와 새를 그리고 그림 아래에 다음 시편을 남긴다.

‘묵은 가지 다 썩어서 그루터기 되려더니 / 푸른 가지 뻗어 나와 꽃을 다 피웠구려 / 어데선가 날아온 채색 깃의 작은 새는 / 한 마리만 응당 남아 하늘가를 떠도네’

강진에도 다산의 피가 흐른다는 걸 강진군은 모녀 동상을 세워 넌지시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홍임이 모녀는 해배된 다산을 따라 남양주까지 올라갔다가 함께 살지 못하고 강진으로 돌아온다. 다산을 흠집 낼 의도는 추호도 없다. 나는 다만 천하의 다산도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계속>



참고 서적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박석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유홍준) ▶『자전거여행 2』 『흑산』(김훈) ▶『시방 여그가 그 꽃자리여』 『강은 이야기하며 흐른다』(한승원) ▶『강진문화기행』(김선태) ▶『강진에 가고 싶다』(조헌주) ▶『실학기행』(권수영) ▶『다시 쓰는 택리지 2』(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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