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영화] '지구를 지켜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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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지구를 지켜라’(감독 장준환)에 나오는 중견 탤런트 백윤식은 과연 외계인일까, 아닐까. ‘지구를 지켜라’는 그의 정체를 놓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얘기가 끝났나 싶으면 이내 다른 에피소드가 끼어든다. 그렇게 엎치락 뒤치락하기 몇 차례. 잦은 반전 때문에 감독이 관객과 장난을 치는 건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하지만 영화는 아련한 슬픔을 남기며 마침표를 찍는다.

'지구를 지켜라'는 엉뚱하다. 한국영화에선 거의 다뤄지지 않았던 외계인이 나온다. 그렇다고 소재의 특이성에 기댄 작품은 아니다. 외계인은 할리우드 SF영화의 단골 소재이지 않은가. 다만 제작비.기술력 등의 이유로 한국영화가 쉽게 다가서지 못한 분야일 뿐이다.

하지만 '지구를 지켜라'는 외계인을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겉모양에 불과하다. 악덕 기업체 사장인 강만식(백윤식)을 안드로메다인으로 확신하고, 그들의 공격으로부터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과대망상증에 걸린 청년 병구(신하균)의 모험담이 SF 분위기를 풍긴다.

'지구를 지켜라'는 '맨 인 블랙''스타워즈 에피소드' 등의 할리우드 SF에 비하면 매우 초라하다. 객석을 제압하는 스펙터클한 영상도, 가공할 첨단 병기도 없다. 외계인의 강력한 텔레파시를 막는다며 신하균이 머리에 뒤집어 쓴 모자는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다. 외계인을 물리치는 무기 또한 벌레에 물린 데 바르는 물파스다.

영화는 대신 다양한 장르를 섞어놓았다. 멜로.스릴러.액션.코미디.미스터리가 맞물린다. 자칫 정체 불명의 비빔밥이 될 수 있으나 이를 독특한 드라마로 빚어낸 감독의 실력이 느껴진다. 세상의 때가 덕지덕지 묻은 강만식과 외계인 색출에 외고집으로 매달리는 순박한 청년 병구의 대립과 충돌에서 알싸한 유머가 번져나온다. 희극과 비극의 경계에서 독특한 긴장감이 빚어지는 것이다.

장준환 감독은 한국 사회의 그늘을 들여다본다. 앞만 보고 달려왔던 지난 40여년간 노출됐던 우리의 병든 모습을 병구라는 캐릭터 안에 농축했다.

노동과 자본의 반목이 극심했던 1980년대식의 사회 의식도 다소 담겨 있다. 요즘 유행하는 유쾌.상쾌.통쾌한 영화가 아닌 것이다. 때문에 '지구를 지켜라'는 다소 무거워 보인다. 영화의 주요 흥행 코드인 웃음도 블랙 유머에 가깝다.

하지만 바로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반갑다. 사회 비판이란 부담스런 소재를 외계인 퇴치라는 황당한 아이디어로 흥미롭게 풀어냈다. 중간 중간 삽입된 애니메이션, 스케치 그림 등도 작품 자체를 마냥 무겁게만 끌고 가지 않는다.

영화에 처음 출연한 백윤식의 호연이 눈에 띈다. 병구에게 납치돼 온갖 고문을 받는 그는 부도덕한 기업가의 전형을 실감나게 연기했다. 천진한 마스크의 신하균도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오랜 만에 맞는 배역을 맡은 것 같다. 정상과 비정상, 순박함과 광기를 넘나드는 만만찮은 역할이다.

아쉬움도 크다. 특히 깊은 산속의 밀폐된 공간에서 병구와 강만식이 맞붙는 장면은 '양들의 침묵''미저리' 등 할리우드 스릴러를 필요 이상으로 참고한 것 같다. 모방은 볼 만했으나 참신성은 부족한 느낌이다.

그래도 부모에게 학대받은 아이, 결손 가정에서 자란 아이를 주로 '정신병자'로 몰았던 할리우드 스릴러와 달리 한 개인의 이상 심리를 사회 전체 차원으로 넓힌 건 이 영화의 미덕이다. 우리 모두 외계인일 수 있는 것. 비록 그게 우화 수준에 그쳐 감독의 향후 분발이 기대되지만…. 다음달 4일 개봉.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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