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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물로 번지는 통화위기 … 한국, 신흥국 수출 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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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설 연휴 직전 국내 A전자의 아르헨티나 영업팀에 비상이 걸렸다. 아르헨티나 유통업체들이 휴대전화·TV 등을 파는 온라인 사이트를 폐쇄했기 때문이다. 페소화 가치 폭락으로 수입품 가격이 뛰자 아르헨티나 업계가 판매 통제에 들어간 것. A 전자 관계자는 “오프라인 매장에서는 제품을 이전보다 20% 비싸게 팔지만 외환 통제로 새 제품을 들여오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며 “금융 불안이 장기화하면 전반적인 판매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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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세게 밀려온 강물이 둑 밖으로 튀기 시작했다.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로 시작된 신흥국 금융 혼란이 한국 수출 기업에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수출에서 중국을 포함한 신흥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73%에 이른다.

 강물이 당장 넘칠 기세인 곳은 채무불이행 우려가 있는 아르헨티나다. 현지 공장이 있는 B전자는 부품 조달에 애를 먹고 있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지난해 외화 유출을 막기 위해 도입한 사전수입신고제(DJAI) 때문이다. 회사 관계자는 “말은 신고제이지만 신고서를 구하는 것조차 어렵다”고 전했다. 수산물 어획·가공업체인 C사는 거래처에서 결제를 미루는 바람에 자금 회전이 빡빡해졌다. KOTRA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무역관은 “제품 구매 시점에 비해 현재 페소화 가치가 너무 떨어졌다며 결제를 못하거나 미루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동남아에서도 한국 기업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인도네시아에서 36개 매장을 운영하는 롯데마트는 생필품 재고를 평상시보다 30% 늘렸다. 물가 상승 영향을 줄이기 위한 선(先) 구매다. 인도네시아의 지난달 물가 상승률은 9%에 육박했다. 윤주경 롯데마트 인도네시아 소매법인장은 “코카콜라·P&G 등과 구매 협상도 지난해보다 3개월 앞당겨 향후 변동성을 줄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1월 수출에 이미 빨간불이 들어온 지역도 여럿 있다. 태국에 대한 1월 수출은 6억2300만 달러로 지난해 1월보다 12.1% 줄었다. 러시아(-10%), 멕시코(-9.4%)에 대한 수출 감소 폭도 크다. 설 연휴로 조업일수가 2일 줄어든 점을 감안해도 심상치 않은 감소세다.

 관건은 중국이 얼마나 잘 버티느냐다. 중국이 한국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국(11%)보다 큰 26%다. 위기 국가로 꼽히는 인도네시아(2.1%)·터키(1%)·태국(1.4%)과는 비교가 안 된다. 1월 중국에 대한 수출은 지난해 1월보다 소폭(0.8%)이나마 늘었다. 미국 등 선진국 시장이 기대만큼 성장해주느냐도 수출 업체에는 중요한 변수다. 홍준표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신흥국 경기 둔화에 대한 수출 감소를 달러 강세(원화 약세)에 따른 수출 수익성 개선이 얼마나 상쇄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국내 경제의 복병은 중소기업의 자금난이다. 중소기업연구원의 홍성철 책임연구원은 “주식·채권으로 자금 조달이 힘들어지면 은행 대출로 수요가 몰리고, 결국 중소기업이 불리할 것”이라며 “2008년 위기 때도 은행은 중소기업의 신용대출부터 줄였다”고 말했다.

 기업들은 우선 언제 범람할지 모르는 강물 감시부터 강화하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지난해 말부터 신흥국 시장을 중심으로 24시간 모니터링 체계를 강화했다. 과거 외환·금융위기가 약이 된 점도 있다. 주요 종합 상사는 이미 달러화 기준 거래와 국가별 환율 위험 방지책을 일상화했다. SK네트웍스는 2008년 금융위기를 계기로 터키의 대양SK네트웍스 지분을 매각했다.

오히려 이번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삼으려는 기업도 있다. GS샵의 김원식 해외사업부장(상무)은 “한국에서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홈쇼핑 시장이 급성장했다”며 “신흥국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신흥시장에서도 홈쇼핑 등을 통한 합리적 구매 패턴이 형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훈·문병주·김현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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