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청동기문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한국문화의 여명기는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된다. 사학자들은 그때를 기원전 3천 내지 2천년쯤으로 추측한다.
이 신석기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물로는 즐문토기가 있다. 영문의 V자 모양으로 밑이 뾰족하고 회색빛깔을 한 토기. 표면에 빗(질) 같이 선을 그은 무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즐문토기라고 부른다. 때로는 빗 같은 것으로 점을 찍은 무늬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토기는 멀리「스칸디나비아」우도에서부터「시베리아」동부에 이르는「유라시아」대륙배부의 각지에 흩어져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런 것으로 미루어보아 즐문토기인들은「시베리아」지방으로부터 한반도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그 일부는 일본으로 건너갔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 즐문토기시대의 평화는 청동기문화를 지닌 무문토기인들에 의해 깨져버리고 말았다. 학자들의 추측에 따르면 기원전 6,7세기. 흙과 돌가루를 섞어만든 짙은 갈색의 토기. 모양도 타원형이고 밑이 평평하다. 그 표면에 아무런 무늬가 없다. 그래서「무문」이라고 한다.
이들 무문토기인들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청동기를 쓰기 시작했다. 책동단검이나 청동족과 같은 유물이 있다. 이들은 모두 무기이다. 무문토기인들이 즐문토기인들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신무기를 사용한 때문이다.
그러나 무문토기인들은 아직도 석기에 더 익숙해 있었다. 청동기유물들이 그리 많이 발견되지 않은 것은 그것을 입증한다. 청동기시대는 무기뿐 아니라 농업도 크게 발달했다. 벼 (초)농사를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이때의 사람들은 즐문토기인들과는 달리 언덕의 움막에서 살았다. 그러나 이 움막의 깊이는 40㎝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질문토기인들 보다는 훨씬 땅위로 올라온 셈이다.
이른바「정치적 권력」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이 시대라고 사학자들은 생각한다. 그런 추측의 근거는 고인돌(지석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떤 경우는, 9m에 이르는 거석을 먼 곳에서 끌어다가 고인돌의 뚜껑(?)으로 얹었다. 그런 힘든 작업은 그 묘의 주인공이 갖고 있는 실력을 알 수 있게 한다. 비로소 이 시대는 부족국가의 기틀을 마련해 준 것이다.
최근 전국 역사학대회에서 발표된 고고학자의 논문에 따르면 요령식 동검 두개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청동검의 조형으로 평가되고 있다. 기원전 8,9세기 때의 유물로 만주요령생 십이대영자의 토광묘에서 출토된 것도 그와 같은 격식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청동기시대를 조감하는 자료가 됨직하다. 그 아득한 이 역사의 아침을 어림하는 범인의 눈엔 도무지 신기하기 만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