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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이 분쟁 조정 … 소송 아니라 빠르고 저렴하게 처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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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대법원장(중앙)이 지난해 새로 위촉된 서울중앙지법 상임조정위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지난해 말 연예기획사 B사는 소속 가수 김모(26)씨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B사는 김씨를 키우기 위해 상당한 돈을 투자해왔고 음반 두 장도 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더구나 김씨가 약속한 일정을 예고 없이 소화하지 않는 경우가 잦아지고, 연말엔 음주 후 부상까지 입어 한달 간 일을 못하게 되자 더 이상 계약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계약서대로 위약금 3000만원과 그동안 일정 취소로 인한 손해까지 모두 5000만원을 물어내라고 청구했다.

 소장을 접수한 서울중앙지법은 일단 사건을 조정에 회부해 보기로 했다. 2주 만에 기일이 잡혔다. 정식 소송에 비해 기다리는 시간이 절반도 안됐다. 중앙지법이 전문가 위원으로 위촉한 가수 태진아씨가 조정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는 B사가 제출한 김씨에 대한 교육비용 등의 명세서와 일정표를 꼼꼼히 확인하고는 “계약 파기 책임은 명백히 김씨에게 있지만 보수를 주지 않고 김씨를 행사에 동원한 것은 회사의 잘못”이라며 “정식 소송으로 가기보다는 여기서 합의를 보라”고 제안했다. 이후 한 시간 가량 조정위원과 양측의 대화가 오갔다. 결국 김씨가 먼저 200만원을 갚고, 나중에 나머지 금액을 갚는 것으로 양측이 합의했다. 6개월 넘게 법정에 나가야 할 사건이 한 달도 안돼 정리된 것이다.

 B사와 김씨 간 사례처럼 법원에서 민사조정제도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는 경우가 점차 늘고 있다. 조정제도란 민사상 분쟁을 법원의 판결이 아니라 법관이나 조정위원의 권유로 당사자들이 서로 양보·타협해 해결하는 제도다. 하지만 일단 조정이 성립되고 당사자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판결과 같은 법적 강제력이 부여된다. 반면 어느 한쪽이라도 조정 결과를 거부할 경우 정식재판을 받을 권리도 보장돼 있다.

 분쟁 당사자가 처음부터 조정을 신청할 수 있고, 소송을 진행하는 도중 법관이 조정에 회부하기도 한다. 법원은 해마다 100만 건 안팎으로 제기되는 사건이 법관의 판결에만 몰리는 현상을 바꾸기 위해 꾸준히 조정제도 활성화를 시도해왔다. 전국 법원에 조정전담법관제를 도입하고, 2009년에는 민사조정법을 고쳐 상임조정위원이 법관 없이 조정을 처리할 수 있도록 권한도 부여했다. 전국 법원에는 30명의 상임조정위원이 위촉돼 활동 중이다. 태진아씨의 사례에서 보듯 조정위원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명망가 중심에서 전문가들로 구성하고 있다. 2010년부터는 본안 재판부가 조정 가능성이 보이는 사건을 전담법관이나 상임조정위원에 맡겨 조정을 시도하는 조기조정제도를 시행하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본안소송의 5분의 1 수준이던 조정신청 인지대를 10분의 1 수준으로 깎아줬다. 덕분에 전국 법원에서 조정에 회부된 사건은 2009년 7만53건에서 지난해 9만3692건으로 33.7% 증가했다. 특히 조정전담판사나 조정위원회에 회부된 경우는 2226건에서 3만926건으로 급증했다.

 하지만 국내 민사분쟁 가운데 조정으로 해결되는 비율이나 조정 결정을 받아들여 사건이 종결되는 비율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일본의 경우 민사소송 1심이 법관의 판결에 의해 해결되는 비율은 33.3%로 조정·화해로 종결되는 비율(32.4%)과 거의 비슷했다. 미국은 전체 민사사건 가운데 1.5% 정도만 정식재판을 거칠 뿐 나머지는 다양한 분쟁조정방식에 의해 해결된다. 독일은 아예 소가가 750유로를 넘지 않는 사건은 조정을 먼저 거치도록 민사소송법 시행규칙에 규정돼 있다. 반면 우리의 경우 지난해 109만여 건의 민사 본안사건 가운데 처음부터 조정을 신청한 경우는 1%도 안되는 9934건, 법관이 조정에 회부한 사건까지 포함해도 8만3000여 건에 그쳤다. 조정결정이 받아들여져 사건이 끝나는 것도 31%에 그쳤다.

 이처럼 조정제도 확산이 더딘 이유에 대해 법조계에서는 “스스로 옳다는 것을 법을 통해 증명받고 싶은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성공보수를 받는 관행이 여전하기 때문에 변호사들의 협조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국가 관련 소송의 경우 공무원들이 책임을 피하기 위해 조정을 기피하는 경향도 강하다고 한다. 서울중앙지법 이영진 조정전담 부장판사는 “조정으로 해결되는 분쟁이 많아지면 조정 자체에 그치지 않고 전체 법원 판결의 질도 올라가게 된다”며 “분쟁 당사자들이 소송에만 집착하지 말고 화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분쟁 스트레스 비용을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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