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 무역적자, 아베노믹스 휘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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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국발 통화 위기가 ‘아베노믹스’의 발목을 잡았다. 일본 아베(사진) 정부의 의도적인 엔저(低) 정책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일본의 무역수지가 사상 최대 적자를 기록했다. 신흥국 통화 위기가 확산하면서 안전자산인 일본 엔화로 수요가 몰리는 바람에 엔저 기조마저 위태로워졌다. 엔저를 통해 수출도 늘리고 물가도 끌어올려 보려던 아베노믹스가 연초부터 초대형 암초를 만났다.

 일본의 지난해 무역수지는 11조4745억 엔(약 121조원) 적자를 기록했다. 무역 통계가 공식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1979년 이후 최대 적자다. 수출강국 일본이 무역에서 3년 연속 적자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수입이 늘어나는 속도가 수출을 압도한 탓이다. 지난해 수출액이 1년 전과 견줘 9.5% 느는 동안 수입액은 15.0% 증가했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원전 가동 중단으로 인해 에너지 수입이 늘었다”고 설명했다. 수출 실적도 뜯어 보면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수출액이 3년 만에 증가세로 돌아섰지만 물량으로 따지면 오히려 1년 전보다 1.5% 줄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수출 지표가 악화된 건 일본 제조업 생산 거점이 해외로 이전했고 전자제품을 중심으로 일본 메이커의 경쟁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로이터통신 역시 “엔화 약세로 수출과 무역흑자가 늘어나는 ‘J곡선(J-curve) 효과’가 나타날 것이란 기대가 무산됐다”고 진단했다. ‘엔저=무역 흑자’ 공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오바마 정부의 싱크탱크 신미국안보센터(CNAS)의 일본 전문가 데이비드 애셔 선임연구위원은 “아베 정부가 엔저 정책을 통해 막대한 통화를 풀었지만 복잡한 일본 경제 구조 때문에 효과가 반감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아베 정부는 엔화 약세를 지향했지만 더 근본적으로 경제 개혁을 해야만 했다. 이 복잡한 방정식을 풀지 못한다면 투자자는 일본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날 일본 닛케이225 지수는 장중 한때 1만5000선 아래로 주저앉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15일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아베 정부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던 엔저 정책도 흔들리고 있다. 한국투자증권 박중제 연구원은 “안전자산으로 꼽히는 일본 엔화가 신흥국 위기로 인해 주목받으며 엔값이 오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일시적으로 엔화가 강세로 돌아서긴 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엔화 약세 흐름이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일본 기업과 경쟁해야 하는 한국 수출기업은 여전히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다”고 했다.

조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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