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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제35화>「정치여성」반세기|박순천(제자 박순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나의 운동원들>
언제나 나의 선거운동에는 여성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지만 특히 1, 2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열렬한 여성운동원들이 많았었다. 1, 2대는 내가 무소속으로 출마했었기 때문에 모든 선거사무와 선거운동을 여성들이 도맡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대 선거 때는 여성단체 대표자 회의에서 서로 출마를 권하다가 아무도 희망자가 없어서 갑자기『내가 하겠소』하고 나섰던 나는 막상 어떻게 일을 시작해야 하는지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주변의 친구들은 제법 일을 꾸며가기 시작했다. 조화를 연구하다 얼마 전 작고한 장선희씨가 광화문파출소 뒤에 있던 자기 집을 내어 선거사무소로 쓰게 해주었고 그 선거사무소는 날마다 떡 해오고 밥 해오는 여성들이 줄을 이었다. 선거자금은 무일푼이었으나 그 당시 선거운동원들은 금반지를 뽑아 기부하면서 자기 돈 쓰며 일해 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대부분이 열성만 가득했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고 있을 때에 가장 일을 조직적으로 처리해간 사람은 조어인씨였다. 그는 종로갑구 42개 동을 전부 통 반 단위로 나눠 명단을 작성하고 그것을 선거운동원들에게 할당했다. 그리고 일일이 방문을 하게한 후『첫 마디에 환영하는 사람은 한번, 반대하는 사람은 4번까지 재 방문하도록』작전지시를 하기도 했다.
이렇게 열심히들 뛰다가 막상 낙선을 하자 사방에서 병나는 사람이 속출했다. 그 당시 광주일보에서 일하던 고영환씨의 부인 허영순씨는 투표하러 급히 비행기를 타고 일부러 서울로 왔었는데 낙선을 하게 되니 드러눕고 말았다. 아내가 사흘씩 단식을 하며 누워있자 고영환씨는『뭘 먹고 싶소?』라고 묻더라고 한다.
허영순씨는 속이 타던 차에 얼른『「아이스크림」을 먹겠다』고 대답한 후 남편을 따라 충무로에 나가서「아이스크림」을 단숨에 6그릇이나 먹어치웠다고 한다. 옆에서 보던 남편은『여성들이 그렇게 애썼는데 안됐다』면서 아내에게 양산1개를 사주었다는데, 허영순씨는 나중에 그 얘기를 하며『결혼20여 년에 처음 받아본 선물이었다』고 웃었었다.
이렇게 나를 위해 애써주던 분들이 모두 6·25로 세상을 떠난 것을 생각하니 새삼 마음이 아프다. 조어인씨는 6윌26일 한강을 건너가라니까『서대문 감옥을 위문하고 내일 떠나겠다』더니 한강을 못 건너고 폭격으로 사망했다. 고영환씨 부부도 공산군에 피살되고 말았다.
여성단체에서 회장을 뽑게될 때는 늘 모두가 안 하겠다고 도망을 가곤 했던 우리들은 사실 국회의원도 여성단체회장 뽑듯 하는 줄 알고 시작을 한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여성 입후보자에게 여성만의 선거구를 따로 마련해달라』는 안을 내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일단 나서보니 그 때까지 몰랐던『정치의 생리』를 나는 어렴풋이 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5·10선거의 개표일은 마침 음력으로 4월 초파일이었다. 나는 낮에 개표결과를 보고 곧 태고사에서 있었던 강연회에 참가했는데『정치는 알고 보니 도박이더라』는 말을 해서 여성청중들을 위로했었다.
2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나는 종로갑구에서 입후보했는데 입후보하기 전부터 역시 수많은 여성들이 몰려와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그때 의정부에서 입후보했던 김종규씨의 부인 현봉애씨는 남편선거는 제쳐놓고 서울에 남아 내 선거운동에 매달렸을 정도였다. 그분은 나의 당선을 위해 누상동에 있는 절에 가서 40일 불공까지 드려주었다.
개표결과 그의 남편은 낙선하고 나는 당선했다. 절에 감사불공을 드리러간 현봉애씨는 스님이『박순천 당선…』하고 불경을 시작하자 절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고 한다.
그들은「여자」라는 굴레 속에서 자기 자신이 못 다한 일들을 나를 통해 이루었다는 것에 감격을 금치 못하는 듯 했다.「여자국회의원」을 자기들 손으로 만들어 눈앞에 본다는 사실이 꿈만 같은 모양이었다. 물론 나 자신도 정말 기뻤다.
나는 53살이었고 나를 늘 자랑으로 아셨던 부모님은 돌아가신지 오래였다.
대한부인회 회장과 부인신문사 사장을 겸임하고 있었던 나는 부인회 회원들에게『누구든 마음속에 정말로 뽑고 싶은 사람을 지지하라. 그리고 부인회 이름을 걸고 선거운동을 하지 마라』고 누차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내 선거사무실에 부인회 회원들이 드나드는 것조차 금지시켰었다.
부인회에서는 그때 6명의 후보를 내었었는데 다른 후보들은 모두 낙선하고 말았다. 그때 당선한 여성의원으로는 여자 국민당의 임영신이 있었다.
2대 국회는 6월17일에 개원했다. 그리고 1주일 후에 6·25가 터졌던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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