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무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2월 추위에 김치 독 깨진다는 말이 있지만, 음력으로 2월을 들어선 지난주의 날씨는 예년보다 약 하강하여 한강 물이 다시 얼어붙는 혹한이었다. 가위 김칫독이 깨어질 만 했다. 그러나 입춘과 우수가 벌써 지났고, 곧 경칩과 춘분이 올 것이니, 이제 분명 봄이다. 춘한노건 (봄추위와 늙은이 건강) 이라는 말이 가장 실감나는 계절이라 하겠다. 봄이 추운들 얼마나 갈 것이며, 늙은이가 건강한들 얼마나 견딜 것인가.
그런데 곧 화창한 봄 날씨가 되리라는 이 말의 여운 속에는 인생무상에 대한 씁쓸함이 풍기고 있다.
금년도 달력을 처음 건 적이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이해도 2할이 지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여름이 오고 가을이 되어 낙엽이 질 것이다. 이른바『연못가 봄 풀의 꿈이 깨기도 전에, 계단 앞의 오동잎은 가을 소리를 낼 것이다』 (미각지당초몽 계전오엽기추성).
과연 인생은 덧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객관적인 사실은 아니다. 일정한 인생관과 가치관에서 비롯된 정감일 뿐이다. 여기서 인생이라 함은, 어떠한 주위환경에서도 어디까지나 인간, 그 자체에 모든 중심을 둔 삶을 의미하며,「덧없다」라는 것은, 이러한 삶에 대한 애착에서 나온 아쉬움의 표현인 것이다.
요즈음 우리는 너무나 바쁘고 복잡한 사회환경에서 돈과 물질에 급급하다가「인생이 덧없다」는 정감조차 망각하는 수가 많다. 더 나아가서는 인생의 중심이 인간 아닌 다른 것으로 옮겨져「덧없다」는 정감 이전에 인생자체가 사라져 버리게 되는 수도 있다. 어느 실업 인이 태평양횡단 비행기상에서 사고가 났을 때 자기자신도 가족도 생각되지 않고, 돌연 죽게되면 여기저기 벌여놓은 사업이 어떻게 될까하고 아찔했다는 말을 들었다. 인생은 사라지고 사업만 남은 실업 인이라 하겠다.
인생의 중심이 인간 아닌 신으로 옮겨져 종교적 순교를 할 때 인생무상의 정감을 초월하듯이, 인생의 중심이 돈이나 물질로 옮겨졌을 때에도 인생무상의 정감은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의 중심을 버리고 자기 이외의 것에 팔려 버렸을 때, 그것이 위대한 신의 경우라 할지라도 암흑시대가 초래되었고, 결국 인간성 회복을 위한 종교혁명이 일어나야 했음을 우리는 역사에서 배우고 있다.
인생은 덧없다는 춘한의 씁쓸한 여운을 예처럼 순진하게 느끼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다.인생이 무상하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은 오히려 아름다움을 지닐 수도 있다. 이 봄추위에 서울에서 매화 향기 한번 못 맡고 부지런히 개학을 맞게 되었으나『매화가 일생이 추워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매일생한불매향)는 그 향기의 시정은 새삼 느끼고 있는 짓이다.
황병익<이대교수·국악>

ADVERTISEMENT
ADVERTISEMENT